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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정 Jan 15. 2024

유랑이 아닌 유람을 마치고

열네 번의 우물우물- 첫 번째 긷기


2박 3일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주방 선반, 욕실문 가릴 것 없이 문이란 문이 죄다 열려 있었다. 내가 떠나자마자 빈자리를 채우듯 찾아온 한파 때문이었다. 내가 당분간 집을 비운다고 하자 아파트 관리인은 내 아파트에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다. 무엇도 얼게 만들고 싶지 않은 나는 그러라고 했다. 집 안의 모든 문들은 한기가 고이지 않게끔 그가 전부 열어둔 것이었다. 역시나 그가 열어둔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수도꼭지에선 다행히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졌다.


살면서 수많은 여행을 했다. 어떤 여행을 재밌고, 어떤 여행은 그렇지 못했는데 그래도 불변한 공통점이 있다면 항상 끝점은 같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언제나 다시 돌아갈 집이 있었다. 그 집이 비록 4평짜리 고시원이고, 월세방이고, 옥탑방이었을지언정 맘 편히 발을 뻗고 누울 수 있는 자리가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유랑이 아닌 유람을 할 수 있었다.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다니다가도 맘만 내키면 볍씨가 못자리에 앉듯 내려앉을 수 있었다.

 

Tomas Sanchez, Color over the Laggon의 일부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내 지붕 아래 눕는다. 고무보트를 타고 지중해를 건널 필요가 없고, 4미터짜리 장벽을 넘지 않고 않아도 되는 일상에 안도한다. 내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은 어쩌다 내게 주어진 것들이 많다. 지구의 어느 곳에선 오롯이 살고자 목숨까지 건다는 사실을 자꾸 잊는다. 오늘의 나는 그걸 기억한다. 내가 가진 것들을 곱씹으며 모든 문을 닫고 잠자리를 준비한다. 여행 내내 바깥에 놓아둔 보리차 주전자는 꽝꽝 얼어붙었다. 그 물을 녹여 마시는 내 몸의 어느 부분이 여전히 차다.

                    

#무해함일기 #CQ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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