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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정 Jan 16. 2024

윈터베리, 선명한 위로

열네 번의 우물우물- 두 번째 긷기

첫눈이다. 새로 살게 된 이곳은 12월에도 반팔을 입고 돌아다녀도 무방할 정도로 따뜻한데 의외다. 어쩌면 나는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후후 불며 마시고 싶어 나간 건지도 모른다. 늪지를 낀 산책로를 한 바퀴 돌고 온다는 게 그만 인근 마트까지 들러 블루베리와 바나나를 사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돌연한 소리에 뒤돌아보니 방금 전까지 나와 손잡고 빙판길을 종종걸음 하던 이가 대자로 뻗어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괜찮냐고 묻는 나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내리막길에서 미끄러진 너는 다행히 다친 데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쑥갓과 청경채를 듬뿍 넣고 따뜻한 어묵탕을 끓여 먹었다. 아주 차가워진 몸을 후끈한 음식으로 데우는 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강의 물도 꽁꽁 얼릴 만큼 매서운 겨울은 여기에선 그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먼 이야기다. 몇 번 입지 못한 오리털 아우터엔 눈이 쌓인 것처럼 하얀 곰팡이가 자꾸만 슬었다.

  


가장자리가 조금씩 얼어붙기 시작하는 늪에 핀 윈터베리는 여전히 붉다. 온통 하얗거나 회색 투성인 늪지숲에서 가장 살아있는 존재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더. 추위에 떠는 산새들에겐 찾기 쉬운 일용한 양식으로, 나 같은 사람에겐 그 색 자체로 위로가 된다. 찬 바람에 쓸리는 뺨과 내 가슴도 그 색으로 물든다. 잠깐이나마 내 마음이 그처럼 열매다.


#무해함일기 #CQ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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