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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정 Jun 30. 2024

60년 넘은 팔뚝에다 슬그머니 팔짱 끼기

누구에게나 팔을 뻗는 알맞은 시기가 있다.

차로 달려서 15분. 만약 운전했었더라면 나는 그곳을 자주 갔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크림색의 톡 쏘는 멜론향 꽃을 돋우는 선인장으로 가득한 투마목 언덕(Tumamoc Hill)을.


텍사스에 온 지 2년이다. 남편의 기나긴 유학 생활을 7개의 캐리어에 욱여넣을 때만 해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게 될 줄 몰랐다.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중국 상하이였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중국 음식을 원 없이 먹겠구나, 드디어 시골을 떠나 대도시에 살 수 있겠구나, 설레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문화와 언어를 배울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마음마저 답답해지는 날이면 나는 투마목 언덕을 오르곤 했다. 그곳은 두 팔을 벌린 사와로 선인장 군락으로 4계절 내내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온통 누르스름한 사막이라 푸르른 숲을 기대할 수 없는 투손에서 그 언덕은 특유의 이국적인 풍경으로 한국의 울창한 산과 들을 향한 나의 그리움을 달래주는 몇 안 되는 곳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팬데믹과 진작 동나버린 잔고로 발을 동동 구르던 나와는 달리, 사와로 선인장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장승처럼 우뚝 서서 한낱 인간인 나를 굽어보는 듯했다.


국립공원에서 만난 10미터가 넘는 사와로 선인장(Saguaro Cactus). 250년까지 살 수 있는 사와로 선인장은 보통 12미터까지 자란다. (사진=박인정)


나는 그 언덕을 오를 순 있어도 혼자선 갈 수 없었다. 나는 운전을 할 줄 몰랐다. 면허만 달랑 있었다. 그것도 운 좋게 말이다. 이론 시험을 겨우 붙고, 실기 시험을 전전긍긍 기다리는데 한국-아리조나 간 운전면허증 상호인정 약정체결 성사로 한국에서 딴 운전 면허증을 애리조나 운전 면허증으로 교환해 준다는 따끈따끈한 소식이 들려왔다. 20살 때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땄던 장롱용 운전 면허증이 이런 식으로 쓸모 있다니. 절차가 간소해진 것보다 마저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면허만 있고 운전은 못 하는 미국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가고 싶은 델 맘대로 못 가서 어쩌느냐고 많은 사람들은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투손엔 내 마음대로 가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곳이 전무후무했다. 쇼핑몰은 너무 북적이고, 다운타운은 슬슬 식상하고, 장이야 나눠 들 겸 남편이랑 같이 보거나 아마존으로 시키면 됐다. 나 하나 옮기겠다고 몇 톤짜리 철을 굴리는 건 지구에도, 내 지갑에도 별 보탬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더구나 남편은 한 대뿐인 차로 출퇴근을 했다. 내가 차를 쓰려면 남편을 학교로 출근시키고 나서야 가능하다는 말인데, 그렇게까지 해서 가야 할 데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막 시작된 유학 생활로 버거워하는 남편에게 초보운전 아내 걱정까지 떠안겨 주고 싶지 않기도 했다.


투산을 떠나기 전 그려본 선인장 (사진=박인정)


그래서 난 버스를 탔다. 이때도 주변 사람들은 걱정했는데, 투손에서 버스는 노선도 부실한 데다 주로 저소득층의 교통 운송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나도 저소득층이었고, 가난하다고 전부 약에 취한 약쟁이거나 총잡이는 아니기에 나는 25센트 동전을 두둑히 쥐곤 버스에 오르곤 했다. 아기 상어 노래를 따라 부르는 아이와 선팅 필름으로 촘촘히 가려진 차창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으면 아주 조금 거기가 한국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연구하는 유학생이거나 출근하는 직장인이었다면 -내가 가진 배우자 비자로는 미국에서 일하는 게 불법이다- 물론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랬으면 돈도 벌고 영어도 늘고 차도 끌고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도 아쉽긴 하다. 어딜 가고 싶다고 할 때마다 선뜻 라이더를 자청해 준 인심 좋은 친구들과 항상 동행해 준 남편 덕분에 운전하지 않아도 살만한 삶이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도 두고두고 고맙다.


그런 내가 운전대를 잡기 시작했다. 한국에선 연수도 받고 왔다. 봉쇄된 중국 국경이 도무지 열리지 않아 원래 가려던 길이 막히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뚫리면서 운 좋게 자리 잡은 이곳 텍사스에 버스마저 없는 사실을 깨닫고는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집도 없는데 차를 한 대 더 사야 한다는 사실이 벌써 부담스럽지만, 응당 해야 하는 일로 더는 다른 이에게 부담을 안길 순 없다. 언젠가 이곳에 놀러 올 부모님이나 친구를, 생길지도 모르는 내 아이를 데리고 공원이나 마트 정도는 갈 수 있는 딸이나 친구나 엄마이고 싶다 . 경우의 수를 대비해 그토록 싫어하던 운전을 자처하다니. 당장 닥친 일을 처리하느라 미래는 뒷전이었던 내게 작지 않은 변화다. 미국에 산 지 7년이 지났는데 이제야 정착할 마음이 생기나 보다.


(사진=박인정)


얼마 전 투손을 떠나 미시간에 새로 터전을 꾸린 친구와 우리가 종종 오르곤 했던 투마목 언덕과 사와로 선인장으로 수다의 꽃을 피웠다. 그 높다란 선인장이 20년 동안 7cm밖에 자라지 않고, 최소 60년은 넘어야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팔을 뻗어낸다는 사실을 안 나는 적잖게 놀랐다. 변함없이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선 선인장도 알고 보니 아주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20년이면 다 자라는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느린 속도로. 하지만 그들에겐 알맞은 속도다.


우리 모두에겐 사와로 선인장 같은 구석이 있다. 취업이나, 결혼이나, 배움이나 누군가의 시선엔 한참 느리지만 당사자에겐 딱 적당한 페이스가 말이다. 고로 나는 믿는다. 지금이 운전을 배우기 딱 좋은 시기라고. 절대 느린 속도가 아니라고. 미래를 향해 지금도 팔을 뻗어내고 있을 사와로 선인장에게 기대어 오늘도 나는 운전대 앞에 앉아 두 팔을 걷어붙인다. 그래도 고속도로는 고속으로 달릴 각오로 조심스레 브레이크에서 발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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