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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정 Jul 07. 2024

울기보단 춤추길 택했지만

우리가 비극을 기억하는 방식

2001년 9월 12일. 나는 친구와 함께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분식점 천장 아래 뒤통수가 불룩한 브라운관 티비로는 어제 자 뉴스가 송출되고 있었다. 나는 떡볶이를 우물거리다 말고 탄성 같은 소릴 질렀다.


높다란 빌딩에 비행기가 충돌하는 장면이 무슨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미국에 큰 재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신문보단 요즘 아이돌이 나오는 연예 잡지를 읽느라 바빴다. 한창 반미 정서가 극심했던 시절이라 잘은 몰라도 어른들을 따라 막연히 미국을 미워했을 때이기도 하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펜타곤에서 불이 나고, 또 비행기가 떨어지고. 떡볶이 한 그릇을 다 비우기 전에 나는 그 끔찍한 참극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또 희생당하고 있는지를 보았다. 친구 말고는 내 탄성을 들은 사람이 없었으나 내 얼굴은 떡볶이처럼 붉어졌다. 그해 가을, 나는 뉴스를 볼 때마다 뿌연 먼지 냄새를 맡았다. 무너져 내린 건물과 그 잔해에서 실종자들을 찾는 이들의 참담한 얼굴이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끔찍한 테러가 있은 지 10년 후, 수첩과 녹음기를 든 젊은 캐나디언 부부가 캐나다 뉴펀들랜드섬의 어느 작은 마을을 찾았다. 갠더(Gander) 라는 이름의 그 마을은 9·11 테러 직후 미국 영공이 폐쇄되는 바람에 미국으로 향하던 비행기 38대가 긴급 착륙했던 공항이 있던 곳이었다.


디즈니월드로 갈 꿈에 부풀어있던 가족, 명품 패션 브랜드 휴고 보스의 회장, 나이지리아 추장의 딸, 거기다 보노보 침팬지까지. 총 6,579명의 사람과 19마리의 동물. 인구가 채 만 명도 되지 않은 작은 섬마을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종도, 언어도 제각각인 사람들과 각종 동물들로 말 그대로 인산인해가 되었다.


2001년 9월 13일, 뉴펀들랜드의 초등학교인 갠더 아카데미 체육관에서 깨어난 승객들. (사진= Scott Cook/Canadian Press)


‘비행기 사람들’ 을 호송하기 위해 스쿨버스 노조는 파업 피켓을 내려놓았고, 모든 교회와 학교엔 수천 개의 유아용 침대가 설치되었다. 많은 마을 주민이 ‘비행기 사람들’에게 자기 집 문을 개방했다. 컴퓨터와 리모컨이 어디 있는지, 욕실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면서 갑작스레 난민이 된 그들이 잠시나마 편히 쉬게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런 갠더 마을 사람들의 정성 어린 보살핌 속에 ‘비행기 사람들‘은 비상 착륙한 지 5일 만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젊은 캐나디언 부부는 9·11테러 10주기를 맞아 갠더를 찾은 ‘비행기 사람들’과 갠더 마을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마법 같은 일들을 취재하고자 그곳에 왔다. 배척과 방관보다는 포용과 화합으로 함께 비극을 이겨냈던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감동적인 실화를 토대로 ‘컴 프롬 어웨이(Come From Away)’라는 이름의 뮤지컬이 태어났다. 컴 프롬 어웨이는 미국 샌디에이고와 캐나다 토론토에서 먼저 선보인 후, 2017년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자리로부터 고작 8km 떨어진 뉴욕 브로드웨이서 대중 앞에 섰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 내가 사는 텍사스의 작은 마을의 무대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공연은 뜻밖이었다. 슬픔보다는 기쁨을, 죽음보다는 삶에 초점을 둔 뮤지컬은 전혀 신파답지 않고 1시간 반 내내 경쾌하고 생기로 넘쳐났다. 1인 5역을 소화하는 배우들의 열연과 지루할 틈 없이 속사포로 전개되는 섬마을 사람들과 ‘비행기 사람들’과의 5일간의 우당탕 동거 이야기는 눈물보단 웃음을 짓게 했다.


물론 쌍둥이 빌딩 화재 진압에 투입된 소방관 아들의 부고를 듣게 된 어머니의 안타까운 사연과 테러범이 납치한 비행기에 가장 친한 동료가 타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기장의 이야기에 울컥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슬픔은 잠시고,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명랑한 에피소드에 나는 미처 눈물을 닦기도 전에 웃었다. 그곳에 모인 많은 미국인들이 그랬다.


토론토에서 공연하는 ‘컴 프롬 어웨이’ 밴드 (사진= SANDLER TOWNEND)


공연의 막이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밴드가 연주하는 켈트 음악 -뉴펀들랜드섬은 과거 영국 식민지였다-의 아코디언과 바이올린의 흥겨운 선율에 모두가 일어나 손뼉을 치고 발장단을 맞췄다. 그렇게 신나게 춤추고 돌아가는 길, 나는 문득 지난 4월에 참석한 세월호 10주기 북토크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나는 10년 동안 유족 곁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받아쓰고 기록한 작가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과연 어떤 표정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가 고민했다는 작가의 고백과 울분에서 울은 사라지고 분만 남았다는 어느 유가족이 전해온 말까지. 눈물 흘리기보단 서로 만나서 반갑다는 미소를 은은히 머금은 자리였지만, 오랫동안 쌓인 애환이 먼지처럼 떠돌다 가슴에 내려앉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그날, 켈트 곡을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의 해맑은 미소와 함께 바이올린 현이 힘차게 떨리는 소리를 듣다 보니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고 청중을 향해 위로의 메시지를 건네던 어느 세월호 기록 작가의 애쓴 미소가 떠올랐다. 전혀 달라 보이는 두 개의 미소가 어쩐지 비슷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정보를 이미 가공된 상태로 얻는다. 제보자의 증언이 담긴 녹취 테이프부터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의 대본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거치며 수없이 편집된 정보를 휴대전화 속 작은 화면으로 습득하는 경우가 실제로 목격하는 경우보다 빈번하다.


9·11 테러도, 세월호 사건도 나는 직접 겪어보지 못했다. 내 주변 어떤 사람도 희생자나 부상자 명단에 들지 않았다. 이토록 철저한 타인인 내가 잠시나마 상실의 비극에 통감할 수 있던 건 비극을 잊고 묻기보단, 꾸준히 되새기고 재탄생시킨 사람들의 노고 덕분이다.


쓰고, 그리고, 춤추고, 그걸 봐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억울한 사고로 한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거대한 슬픔이 한 톨 덜어진다고 믿는다. 한 시대를 점령한 트라우마로 여전히 괴로워하는 세대를 위로하는 가장 큰 힘이라고도 믿는다. 비극을 희극처럼 연기한 배우들과 울음 대신 애쓴 웃음을 짓던 작가 덕분에 나는 그날의 참극들을 기억한다. 잊어서 더는 아프지 않은 일로 치부하기보단, 아파도 잊지 않고 깨어있기를 선택한다.


뮤지컬을 보고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 밀물처럼 우르르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그제야 배우들의 유쾌한 대사와 관객들의 호탕한 웃음 아래 뿌리 깊게 내려져 있던 큰 울음을 알아차렸다. 한참 웃고 춤춰야 한풀 가라앉는 거대한 빙산 같은 슬픔이 주차장 타워를 오르는 사람들 등 뒤에 고요히 얹혀있었다.


(사진=박인정)



*영월매일에서 동시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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