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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정 Oct 10. 2024

나의 늙지만 기특한 에그에게

‘문화유산 답사기’도, ‘위대한 유산’도 아니지만.

변기는 대부분 하얗다. 미국 텍사스의 우리 집 변기도 마찬가지다. 청결과 순수함을 대표하는 그 흰색은 한동안 나의 실패와 상실을 떠오르게 하는 잔인한 색이었다.


5주 하고도 4일. 임신을 ‘체험’했다고 할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임신 계획을 하자마자 찾아와 준 행운만큼이나 이별은 갑작스러웠다. 하혈하는 열흘 내내 나는 변기 앞에서 망부석이 되었다. 한때는 소중한 생명을 품었던 자궁 내막과 임신 조직이 흘러 내려가는 걸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괜찮다고. 또다시 찾아와 줄 거라고. 애써 웃어 보이는 다짐은 내 몸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선연한 슬픔에 몇 번이고 허무한 물거품이 되었다.


다행히 별 고통 없는 자연유산이었다. 더는 자궁에 손님이 없음에도 임신 호르몬은 더디게만 내려갔다. HCG(임신 호르몬) 수치 19. 비행기를 타도 된다는 담당 의사의 허락하에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도 내 몸은 여전히 임신을 잊지 못했다. 비행기가 태평양을 지나는 14시간 동안, 잔인한 흰색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노트북을 열고 타자를 두드렸다. 커서가 반짝이는 네모난 흰색 창은 내게 도피처였다.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백지가 되어 나를 위로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40대 초반 출산율이 20대 초반을 앞서는 나라는 38개 회원국 가운데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그렇게 태어나는 출생아 중 시험관 같은 보조 생식술의 도움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숫자는 해마다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결혼은 늦춰지고, 산모의 나이는 고령화되면서 자연 임신은 더 이상 그 이름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유명 난임 전문 병원이 기획한 난자 냉동 팝업 스토어의 전경. 당장은 커리어나 개인 생활에 집중하고 싶은 젊은 세대에게 많은 관심을 모았다. (사진=캐치테이블 앱)


늦깎이 임신을 준비하는 나 또한 그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운 좋게 전쟁을 치를 필요도, 종교적인 억압도 없는 나라에서 태어나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별로 자각하지 않아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 유산을 겪고 나니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체감된다. 자궁을 가진 가임기 여성으로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지, 아이를 잃거나 가질 수 없다는 비극 앞에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미리 아이를 가졌더라면 이런 우려가 덜했을 것이다. 하지만 배포나 용기보단 걱정을 인형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우리 부부는 미국 텍사스에 자리 잡는 것만으로 힘에 부쳐 아이는 꿈도 꾸지 못했다. 월세방으로라도 터전을 꾸리고, 마침내 새로운 가족 구성원을 위한 초석을 다지려는데 시작부터 난관이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 평생 월경을 해왔는데…. 월경은 성공적인 임신을 위한 저축 같은 게 아니다. 실패한 임신으로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자궁 내막을 몸 밖으로 밀어내는 과정에 불과하다.


텍사스 시골에서 딱히 할 것도 없고, 유산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나는 위로와 조언을 얻고자 한국 인터넷 서점에서 유산에 관한 도서를 검색해 보았다. 그러나 서점엔 여성의 유산에 대한 책보단 ‘문화유산 답사기’나 ‘위대한 유산’ 같은 서적이 대부분이었다. 임신한 여성 중 5분의 1이 유산을 한다는데, 그에 관련한 서적이 전무후무했다.


미국 텍사스의 가정의학과 진료실 전경. 나를 진료해 준 두 명의 여성 의사는 자신의 유산 경험을 들려주며 내게 진심 어린 위로를 해 주었다. (사진= 박인정)


내 이야기는 그런 멋들어진 유산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아이를 가지길 바라는 여성과 그 가족이 겪을 수 있는, 주변에 한두 명 씩은 있는데 누구나 쉬쉬하고 쉽게 꺼내지 못하는 실패와 상실의 이야기다. 어떤 이에겐 이런 소재가 불편할 수 있다. 스스로 흠이자 약점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어 듣게 된 이야기들은 전부 내게 위로다. 진정 위대한 유산으로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다.


한국에서 공수해 온 3개월 치 한약과 함께 나는 다시 텍사스로 돌아왔다. 혼자 끓여 먹는 미역국이 그래도 맛있으라고 미역도 완도 산으로 사 왔다. 나는 또 흔들리겠지만, 흔들리는 대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덜 흔들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남편과 우리 부부의 결실이 되어 줄 존재를 위해 단단해지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설령 변기 속을 바라보며 또 다시 잘 가라 인사를 하게 되어도 너무 울지는 않기. 일단은 그게 내 목표다. 그러니 우리 힘내보자고. 나의 늙지만 기특한 난자를 향해 오늘도 나는 속삭인다. 엽산과 비타민이 풍부한 식재료로 내 배를 불릴 생각부터 한다.


(사진=박인정)


*영월매일에서 동시 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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