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이것 또한 삶이라고.
나는 텍사스 시골에 산다.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석유를 퍼 올리는 시추기가 느릿느릿 고개를 드는. 도로에서 경적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고, 카페 테이블에 지갑과 차 키를 두고 화장실을 가도 될 정도로 안전하고 평화로운. 할 게 너무 없어서 ‘아이나 낳아 키울까.’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그래서 난 아이를 낳았다. 물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30대 중반을 넘기며 삶이 대폭 재미 없어졌다. 인생의 낙이었던 예술과 유흥이 전과 같지 않아 진 것이다. 그러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100세 인생이라는데, 벌써 삶이 지루하면 남은 인생은 어떡하나. 억지 텐션을 끌어올려 삶을 즐기려 노력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더는 무리였다.
사실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몇 년 전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나 말도 안 통하는 타지에서 아이를 낳고 기를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해졌다. 시골 살이가 무료하다는 이유로 아이를 낳는 건 너무 일차원적인 선택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만 한 데가 없었다. 딱히 뭐가 없어 딴생각조차 할 수 없는, 속세의 유혹에 취약한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르기에 이보다 적합한 곳이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와중에도 자꾸만 내 눈엔 아이들이 들어왔다. 햇살에 그을린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웃는 아이들. 그런 미소를 가진 아이를 만날 수 있다면… 결국 난 결심했다. 아이를 낳기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보기로.
난 자문한다. 여기가 서울이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과연 같은 결정을 내렸을까. 제 밥그릇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치열하고 각박한 도시에서 내 아이를 보살피거나 남의 아이를 배려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말이다. 내 고향이자 한때 삶의 터전이었던 그곳에 평생 살았더라면 아이는 꿈만 꿨을 확률이 높다. 어쩌면 지하철 임산부 양보석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이것 또한 삶이라고. 서울에서 11,200km 떨어진 이 외딴 시골은 내게 그걸 가르쳐준다. 지루하기만 했던 삶을 영위해야 할 이유 또한 확실해진다. ‘아이에겐 엄마가 필요하다.’ 반박이 불가한 명제다. 살면서 이처럼 명쾌한 해답을 구한 적이 있었나 싶다.
늘어나는 아이의 몸무게와 비례해 나는 단순해진다. 소설을 읽고 합평을 하거나, 사람들과 함께 희곡을 낭독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삶을 모토로 삼았던 나는 이제 아기 기저귀를 갈고, 젖을 먹이고, 아기 등을 토닥거리며 하루를 보낸다. 클럽의 화려한 조명 아래서 춤추는 대신, 오리 장난감에서 흘러나오는 동요에 맞춰 어깨춤을 춘다.
곧 핼러윈이다. 이웃들의 잔디밭엔 유령들과 호박들이 늘어난다. 영화 속 무시무시한 시리얼 킬러들을 익살스러운 마스코트처럼 만들어 입간판처럼 세워놓은 앞집 아저씨가 벌써 크리스마스를 위해 나무 패널을 썰고 자르는 게 차고 문을 통해 내다보인다.
'나도 내년엔 아이와 함께 핼러윈과 크리스마스 준비를 해야지.'
지붕 처마에다 전구 줄을 매다는 이웃집에게 엄지를 들어 보이며 나는 생각한다. 마침내 전구가 점등한다. 색색의 전구 알을 바라보는 유모차 속 딸아이의 눈망울이 반짝, 빛이 난다.
함께라서 단단한 우리의 이야기, 인스타그램 @magazine_dandan을 팔로우하시고 전 세계 각자의 자리에서 꽃을 피우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글 미리 보기부터 작가들과 일상을 나누는 특집 콘텐츠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여러분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