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수수밭」

(모옌지음, 옮김, 출판사, 2019)을 읽고

by 도도히


겨울 수수밭 바람소리


작가는 1955년 중국 산둥성 가오미현 출생으로 소설가, 극작가로서 201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본명은 관모예, 필명은 모옌(莫言)으로 ‘말하지 마라’는 뜻이다. 문화대혁명 시절 검열과 억압의 분위기에서 익힌 생존 전략이다. 말은 하지 않되, 글로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중일전쟁, 문화대혁명 등 격동의 중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권력에 억눌리면서도 살아남은 민중의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구현하였다. 권력과 역사에서 배제된 사람들, 변두리 인물들을 설정하여,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폭력을 그려낸다. 붉은 수수밭을 배경으로 삶의 애환과 진실이 강렬한 이미지로 펼쳐진다.


시간적, 공간적 배경

이 소설은 1930~40년대 중국 산둥 지방을 배경으로 하며, 일제 강점기와 중일전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화자는 손자의 시점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그들이 살아온 시대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기법으로 전개한다.

가오미현 둥베이 지방을 배경으로 마을 근경에 모수이 강물이 흘러가고 그 옆으로 붉은 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이다. 작가는 이곳을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누추하고, 가장 초연하면서도 가장 속되고, 가장 성결하면서 가장 추잡하다.’고 말한다. 또한 이 곳 마을을‘영웅호걸도 많지만 개잡놈도 제일 많고, 술도 제일 잘 마시고 사랑도 제일 잘 할 줄 아는 곳’이라고 서술한다. 8월 만추가 시작되는 가을풍경을 ‘끝도 없이 펼쳐진 수수의 붉은 빛이 광활하게 일렁이는 피바다를 이루고, 수수로 덮인 마을은 찬란하게 빛났다. 수수의 슬픔은 처연했고 수수의 사랑은 격렬했다.’고 전한다.


시대적 배경은 1930년대 일제가 침략하여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시기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주축으로 마을 사람들은 일제에 저항하여 사투를 벌인다. 그 모든 일들은 수수밭을 배경으로 벌어진다. 그들은 무성한 수수밭 속에 숨어 있다가 싸우며 비참하게 죽어 그곳에 묻히고 수수밭은 붉게 피바다로 일렁거린다. 그 곁으로는 모수이 강물이 저마다 처절한 곡소리를 내며 쿵쾅쿵쾅 흘러간다.


주요인물과 캐릭터

할머니(다이펑롄)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검은 노새 한 마리를 주는 조건으로 혼인을 하게 된다. 양조장을 운영하여 거부가 된 산팅슈 가문에 외아들인 나환자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혼인길에 가마꾼인 할아버지와 눈이 맞아 수수밭에서 정사를 벌이게 되고, 남편이 죽은 뒤 함께 살게 된다. 이처럼 수수밭은 이곳 마을 사람들의 삶과 죽음, 사랑과 전쟁이 펼쳐지고 마지막에 그곳에 죽어 묻히게 되는 삶의 터전이자 주요 생활 무대이다.


할아버지 위잔아오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위잔아오는 사내 중의 사내로 패기가 넘치며 용맹무쌍한 영웅호걸로 묘사된다. 그러나 도덕적인 잣대로 보면 결코 정의롭거나 훌륭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이미 열여덟의 나이로 살인을 하고 가출을 하는 캐릭터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된 어머니가 스님과 정분이 나자 그 스님을 죽이고 집을 나온다. 그리고 떠돌다가 혼례 가마를 운반하는 일을 하게 되고 운반도중 신부에게 꽂혀 수수밭에서 신부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시아버지 양조장 주인과 신랑이 될 문둥병자인 아들을 죽인다. 또한 범행을 은폐하고자 불을 지르는 악행을 서슴지 않고 자행한다. 그 후 양조장 일꾼으로 숨어들었다가 할머니와 살게 된다. 그 후에도 그 집의 하녀들을 둘이나 더 취하고 매사를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가부장적 인물이다. 그는 싸울 때는 용감무쌍하고 집단 속에서는 리더십이 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장부이다. 개인적으로는 제 욕구충족을 위해서 목숨을 개의치 않고 덤비는 막무가내 인간이다. 사람을 함부로 다루고 죽이며 사랑에 있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상남자 중의 남자이다.

하지만 마을주민들을 괴롭히는 토비를 소탕하고 그 무리의 수장이 된다. 그의 명성은 먼 곳까지 퍼져 많은 이들이 두려워한다. 일제에 맞서 사투를 벌이고 많은 전리품을 거두는 등 투사로서 용맹성과 출중한 리더십은 가히 전설적인 인물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할머니 역시 어린 나이에 시부와 남편을 잃고 양조장 여주인으로 강단 있게 큰 집안을 이끌어가는 여장부다. 할아버지를 도와 일제저항운동에 참여하고 당시의 풍습을 깨고 여성의 권리를 당당하게 펼치는 개성이 강한 여인이다.

돈에 미혹되어 문둥병에 걸린 남자에게 딸을 혼인시키는 친정 부모님을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하여 손절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음에 드는 건장한 남자를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당시 여자들은 전족을 했고 친정 부모나 남편에게 구속되어 평생 억압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줄 아는 선구적인 여인이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평생 장애를 떠안고 살아야하는 처지를 벗어나고자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이렇게 할머니는 주체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독립적이고 책임감이 강한 여인으로 양조장을 운영하며 마을 공동체의 중심인물이 된다.


주요 사건과 내용


이 작품은 소년의 시선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을 전달한다. 일인칭 관찰자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이 혼합되어 서술된다. 문체가 화려하다. 많은 수식어를 써서 각 장면을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한편의 풍경화를 보는 듯 지루하지 않고 술술 잘 읽힌다. 촘촘한 스토리와 밀도 높은 구성으로 재미있게 펼쳐진다. 전체적으로 책장이 빠르게 넘어간다. 각 편마다 비선형 서사방식을 취해,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스토리가 펼쳐져 풍부한 입체감이 느껴진다.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 무자비한 수탈과 잔혹한 폭력 속에서 마을 주민들이 저항하고 투쟁하는 내용이다. 끝없이 펼쳐진 붉은 수수밭을 배경으로 인간의 선과 악, 생과 사를 복합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같은 동족끼리도 교활한 전략과 술수로 대립하고 뺏고 뺏기며 쫓고 쫓기는 여정을 그린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인간본성을 성선설이 아니라, 성악설 쪽임을 느끼게 한다. 자기의 이기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을 짐승처럼 함부로 대하고 가볍게 살상을 저지른다.


따라서 일제의 잔혹성뿐만이 아니라 자국 내 서로 다른 조직인 토비, 국민군, 팔로군이 서로 대립하고 투쟁한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온전한 세계는 다양한 군상의 여러 가지 스펙트럼과 거대한 복합성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어필하고자 했을까. 당시 중국 인구는 약 4억 명 정도였다. 몇 년 전 상해의 거리를 지나면서 거대한 파도처럼 인산인해를 이루는 군중을 보면서 놀랐던 적이 있다. 모래알처럼 많은 인파 속에 묻혀 떠밀리다보니 한 인간, 한 개체의 목숨이 참으로 가볍고 작게 느껴졌다.


소설을 읽으면서 수많은 인물들이 쉽게 죽어나가고 죽은 시체들이 함부로 널브러져 수수밭에 버려지고 부패될 때까지 방치되는 것을 보며 의아했다. 아무리 일제치하 전시상황이라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수수밭은 피로 물들고 썩어 악취가 나는 주검을 수백 마리의 개떼가 인육을 뜯어먹는다는 장면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 귀한 줄 모르는 수억 명의 인구와 거대한 대국의 규모, 그리고 유구한 역사와 저들의 풍습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인 일본군의 무자비한 수탈과 잔혹성이 있었다. 붉은 수수밭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인생이 어떻게 펼쳐졌다가 묻혀지는 지, 동족 간 또는 국가 간에 약육강식의 역사가 얼마나 부당하고 비극적인지를 알리기도 한다. 또한 그 속에서 중국의 문화가 어떻게 진화하고 발달해 왔는지를 전하기도 한다.


일본군이 마을을 침략하면서 평화롭던 마을은 전운이 감돈다. 너무나 잔인한 왜놈들의 만행에 분노한 마을 사람들은 수수밭에 매복전을 펼치고 복수의 칼날을 간다. 붉은 수수밭은 싸움터가 되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피로 물든다. 주요 인물들도 하나둘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일본군의 잔학함을 고발하면서도, 단순한 영웅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의 비극과 인간성의 복잡다단함을 동시에 그린다.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서 인간 내면의 욕망과 폭력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사랑의 기억, 그 힘에 대하여


연일 비가 오락가락 장마철이 시작되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송도 달빛공원 강물이 불어있다. 사선으로 내려 꽂히는 빗방울을 안고 강물이 무심히 흘러간다. 흐린 하늘도 오늘따라 먹먹하다. 그 옆으로 쭉 뻗은 해안도로는 끊임없이 자동차들이 질주한다. 갑자기 119 병원차가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쏜살같이 지나가기도 한다. 누군가 응급실로 실려가나보다. 바쁜 도시인들은 시시각각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으면 누구도 쉽게 놀라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려니 한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이다. 저마다 그와 같은 또는 그 이상의 상처와 사건들에 싸여서 씨름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징표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그 많은 인물들이 다 죽고 치열하게 싸웠던 현장이 텅 빈 듯하다. 용감무쌍하게 싸웠던 할아버지도 죽고 충직한 일꾼 뤄한 큰 할아버지도 비참하게 죽었다. 작은 발이 매력적이던 할머니는 서른 둘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왜놈들의 총탄에 쓰러졌다. 작은 할머니 역시 왜놈들의 폭력으로 딸을 잃고 미쳐서 헛소리를 지껄이다가 죽는다.


현실도 작품 세계도 세월이 무상하다. 시간은 멈출 줄 모르고 속절없이 빠르게 흘러간다. 지난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가고. 너는 누구냐. 왜 여기 혼자 서 있나. 어디로 가는 여정인가. 비구름이 몽실몽실 떠가며 질문을 던진다. 비요일, 오랜만에 커피향을 맡는다. 황혼녘 검은 나뭇가지에 까치 한마리 앉아 있다. 어느 겨울 세밑, 가장 쓸쓸한 저녁풍경이다.


들국화의 ‘사랑한 후에’라는 노래를 듣는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저녁 어스름이 지필 때면 다들 집으로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나......이젠 잊어야만 하는 아픈 기억이 별이 되어 반짝이며 나를 흔드네.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의 커다란 울음으로도 달랠 수 없어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오늘밤엔 수많은 별들과 기억들이 내 앞에 다시 춤을 추는데 저 불빛은 누굴 위한 걸까......’


창문 너머 공터에 개망초가 안개꽃처럼 하얗게 피어 바람에 흔들리고, 언제부턴가 개구리 울음 소리가 소낙비처럼 쏟아지고 있다. ‘사랑은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는 문장을 기억하며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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