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지음 ㈜ 생각의 나무, 2001)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홀로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장군’ 하면 퍼뜩 떠오르는 시조다. 나라를 걱정하는 장군의 마음이 애절하다. ‘달 밝은 밤 성 누각에 홀로 앉아, 깊은 시름에 잠긴 장군의 모습’이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리소리가 너무 구슬퍼서 애가 저린다는 내용은 장군의 우국충정을 애절하게 느끼게 한다.
이 책은 작가의 나이 오십 대 초반(2001)에 출간되었다. 서문에서 ‘2000년 가을에 다시 초야로 돌아와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했다’, ‘누구와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없으므로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겠다’고 한다.
의미심장하다. 새 천년 벽두를 돌이켜보니, 크게 공감되는 바가 있다. 기존의 질서가 흔들릴 것 같은 막연한 불안이 있었다. 중요한 기관, 작동매체들이 제대로 기능하고 작동할 것인지 우려되었다. 지표가 흔들리는 삶, 어떤 슬픔과 쓸쓸함이 깃든 메시지가 전해진다. 작가는‘난세에 위태로운 국가를 칼 한 자루로 지켜낸 성웅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며 집필생활을 계획한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은 인물의 삶과 내면을‘작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녹여내어 서술한다.
일제침략과 중국 명나라의 소극적인 원조 사이에서, 약소국의 무장이 겪는 복잡한 심사가 잘 드러난다.
효성심이 깊은 아들이자 아비로서, 가정에 사랑과 책임을 다할 수 없었던 전란 중의 삶이 처연하다.
읽어가다 보면, 꼭 작가의 이야기인 듯이 느껴지고, 어느 새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익히 알려진 충무공의 위대한 치적보다는, 주변 상황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
개인적인 내면의 정서와 심리묘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동인문학상을 수상한다.
‘인간의 고독한 내면을 순수한 표현으로 세상과 맞선 데서 솟아난 이야기’,
‘구국영웅의 무훈담을 세상을 버린 자의 울음으로 바꾸어 독백으로 탄주함’
‘음표로 표기가 불가능한 음역의 노래로 재창조’하였다는 선정이유와 함께.
작가의 문체는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고 명료하다. 풍부한 감성과 오감으로 느끼는 순간들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낸다. 다년간 기자의 생활로 다져진 필력과 절제된 문장력이 높은 가독성을 지닌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 싶었다.……”
“우수영의 가을 물빛은 날카로웠다.
먼 산과 먼 섬들의 갈묏빛 능선이 도드라졌고, 바람의 서슬은 팽팽했다.
겨울이 다가오는 바다에서, 저녁마다 노을은 투명한 하늘 위로 멀리 퍼졌다.……”
이처럼 작가의 감각적이고 시적인 표현과 간결한 문체는 독자의 시선을 끌고 긴 여운을 남긴다.
오랫동안 쌓아온 풍부한 어휘력과 단련된 습작의 힘이다.
개성적인 쉽고 명료한 문체는 여타의 에세이와 다른 작품에서도 눈에 띤다.
많은 독자들이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다.
화자는 늘 노모에 대한 걱정, 아비와 지아비로서 가족을 돌볼 수 없었던 개인적인 고뇌를 보인다. 관기 출신인 여진과의 사랑은 독자들의 흥을 돋우기 위한 재료로 충분하였다. 자나 깨나 마음속에 있던 노모에 대한 효심, 장례식에도 갈 수 없었던 참담한 심정, 남편 없이 출산하고 혼자 자식들을 키워내는 아내의 고단함, 아비보다 먼저 비명에 간 아들 면에 대한 슬픔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뼈아픈 일이었다. 쉰셋의 나이, 핏빛 바다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을 때까지, 그의 굵고 짧은 인생은 그야말로 절망과 외로움과 통한의 세월이었다.
책장을 넘기며, 독자도 그와 함께 절망하고 고뇌하며 울 수밖에 없다.
현실은 왕실의 무능함과 당파 싸움으로, 조정은 분열과 부패로 썩어 있었다. 올바른 인재등용이 불가했고, 사사건건 부딪쳤다. 임진년 왜적의 외침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큰 고통을 겪고 전쟁의 피해는 극심했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 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울었다.”
작가가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칩거하던 순간이 스친다. '칼'의 의미를 생각하며, 불가능한 사랑을 노래하고 ,거친 세월을 견디었을 것이다. 혹자는 이 책을 ‘최고의 인생 책’이라 하고, 또 누구는 ‘작가의 광팬’이라고 한다. 광풍의 시절, 이리저리 내몰리며, 혼란과 어둠을 칼의 기개로 헤쳐 나간 한 영웅을 생각하며, 필자도 이야기 속으로 스며든다.
첫 장에 소개된 ‘한산도 야음’은 아직도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한다.
‘한 바다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 ……,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
붉게 아수라장이 된 바다 울음을 연상시킨다. 새롭지는 않지만 마음을 울리는 문장이다. 당시 곤핍한 서민들의 삶, 약소민족의 억울함, 난세에 한 영웅의 고독감과 비애, 비열하고 못난 정치인들의 정쟁으로 근심가득 잠 못 드는 화자의 모습이 부침한다.
책장을 덮으며,
사람이 죽어야 할 적절한 순간이 언제인가를 생각한다.
죽음으로 끝날 것이 자명한 싸움에 일방적인 상부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가.
그의 죽음을 생각하니, 싸하니, 작은 전율이 인다.
삶은 참으로 가볍고 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