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후밀 흐라발, 문학동네 2018)을 읽고
보후밀 흐라발(1914~1997)은 체코 출신 소설가다. 법학을 전공한 후, 처음에 시를 썼으나, 철도원, 보험원, 잡역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 마흔 아홉 살, 늦게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체코 최고의 작가, 현대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 하나라는 평을 듣는다.
지하 폐지 창고에서 책 압축 공으로 평생을 살아온 한탸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미치도록 좋아하는 일을 하며, 책 더미 속에 묻혀 살다가, 책과 함께 사라지는 삶을 보여준다.
매일 지하창고로 쏟아져 들어오는 수천수만 권의 책 속에서 수많은 작가들을 만나고, 그들과 상상을 넘나들며 환상을 보는 책광이다. 책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동서양의 현인, 예술가, 사상가들의 삶과 그들의 작품 세계에 빠져들어 비현실 속에서 고독을 즐긴다.
작품 속 캐릭터는 작가 ‘보후미 흐라발’을 진하게 투영하는 인물이다. ‘프라하의 봄’ 이후, 억압된 현실은 검열, 언론 탄압, 출판금지로 침체기였다. 많은 작가들이 망명을 떠났으나 작가는 끝까지 조국에 남아 모국어로 작품 활동을 한다. 이 작품에서 한탸는 새로운 문명의 발달로 압축기가 자동화 되지만 끝까지 자신의 삶을 고집하며 그 속으로 사라진다. 작가와 쌍생아처럼 겹치는 부분이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스토리다.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활자네 찌든 나는, 그 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산전수전을 경험한 인간일수록, 그의 전 생애는 커다란 백과사전이나 박물관이 될 것이다. 수천 권의 책이 깃들어 있는 화자야말로 '활자에 찌든, 백과사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론 가여운 생각이 들다가도, 함부로 흉내낼 수 없는 숭고함이 느껴진다.
책을 사랑하는 자만이 압축할 권리가 있다
조선 시대 ‘책 바보’ 이덕무가 떠오른다. 책을 너무 사랑해서 ‘간서치(책 바보라)’라는 별명으로 불린 사람이다. 책에 미친 그는 ‘책을 이불처럼 덮고, 책을 병풍처럼 쌓아’ 겨울 한파를 견뎠다. 고열로 눈이 충혈 되고, 손가락이 동상에 걸려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평생 책 더미에 묻혀 산 한탸와 닮았다.
매 장마다, 첫 문장에 반복적으로 쓰인 문장이 있다.
"삽십 오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지하방은 어두침침하고 생쥐가 우글거리는 더러운 곳이다. 그곳으로 끊임없이 수많은 책이 쏟아져 들어온다. 한탸는 ‘책을 가까이 하기 위해 압축공이 될 생각' 하였고, 버려진 책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권’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삼십오 년 동안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러브스토리라 한다. 매 장마다 그 말을 되뇌며 반추하는 이유다.
첫 머리에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는 괴테의 말을 인용한다. ‘책을 사랑하는 자만이 책을 압축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리라.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공포가 인간을 덮친다. 이 모두가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그렇게나 시끄러운 내 고독 속에서 이 모든 걸 온 몸과 마음으로 보고 경험했는데도 미치지 않을 수 있다니, 문득 스스로가 대견하고 성스럽게 느껴졌다.”
산처럼 버려지는 수천 권의 책 더미 속에서, 책을 고르며 정신이 팔려있는 그를 본다. 시끄럽다는 것은, '온갖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상태'이다. 수천 권의 책 더미 속에서 건져낸 값진 내용과, 사념으로 머릿속이 시끄럽다. 현실과 동떨어진 책 속에 갇혀서 스스로 고독한 시간을 즐긴다. 이것이 그의 러브 스토리다. 은퇴 후에도 이 일을 하려고 압축기 살 돈을 저축한다. 책에 미쳐서 고독을 즐기는 화자의 삶이 숭고하게 느껴진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존하기 위해서 싫어도 하는 일이 많다. 그렇게 보면 화자는 정말 행운아다. 책 속에 빠져, 수많은 사념 속을 헤매는 고단하고 고독한 일상이나, 귀가할 때, 그는 그날 얻은 책으로 행복하다. 거처에는 그렇게 모은 책이 3톤가량이나 된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부적응
화자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환경을 비관적으로 생각한다. 새로운 기계와 컨베이어 작업을 목격한다. 표지가 뜯겨진 책들이 ‘내장을 드러내며’ 펼쳐졌으나 ‘책장을 들춰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며 탄식한다. 또한 멈출 줄 모르는 컨베이어는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일을 해치우고 있다’며 희망을 잃는다. 네로의 폭정에 못이겨 목욕탕 속에 빠져 죽은 세네카처럼 압축기 속에 들어가 책과 함께 압사할 것을 결행한다.
“나는 녹색 버튼의 작동을 중단하고 폐지가 가득한 압축 통 속에 나를 위한 작은 은신처를 마련한다. 아무렴, 나는 여전히 쾌활한 사내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욕조에 들어가는 세네카처럼 나는 한쪽 다리를 압축 통에 넣고 잠시 기다린다. 다른 한쪽도 마저 통 안으로 무겁게 떨어져 내린다. 나는 똬리를 틀고 살핀 다음 무릎을 꿇은 자세로 녹색 버튼을 누르고 완충물인 책과 폐지 속에서 몸을 웅크린다. 그녀의 이름이 떠올랐다. ‘일론카’ ”
‘일론카’는 기억 속 사랑하는 연인이다. 현실적인 삶과 대비되는 순수함과 구원의 상징이다. 죽을 때 단 한번 운다는 가시나무 새의 전설이 떠오른다. 평생 단 한 번,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위해 , 가시나무의 길고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죽음에 이른다는 전설이. 그 순간, 새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세상에 마지막 선물을 남기는 것이다.
생쥐들의 놀이터, 지하 창고 방, 수많은 책 더미 속에 묻혀 있는 한 사내, 보물 같은 책을 찾아 책속을 헤매며, 책을 압축하며 살았던 사람. 건져낸 책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고된 그의 하루는 행복이었다. 미친 듯 책을 사랑했던 고독한 남자는 그렇게 압축기에 제 몸을 넣고, 책과 함께 영원한 여행을 떠난다.
인간의 행복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미친 듯 좋아하는 일에 빠져 살다가 자신을 온전히 불사르는 일이다. 하던 방식으로 일을 계속 할 수 없게 된 그의 마지막 선택은 비장하고 긴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