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드 브란튼베르그, 황금가지, 2016)을 읽고
"그에게 열려있지 않은 직업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가 소년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그러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겠지"
이 책은 출간(1977) 되자마자,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너무나 당연시해 온 남성중심 사회, 그 부조리하고 불공평한 현실을 직시하고자 쓴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현실과 반대로, 여성이 사회의 주역이고 주체세력이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권력의 중심에 여자가 있다. 남자는 주변인으로 삶의 언저리에 기생한다. 세상이 현실과 정 반대로 돌아간다. 여자가 바깥사람, 남자가 안사람 역할을 한다. 재미있는 세상이다.
오랫동안 여성에게 덧 씌워진, 부당하고 불공평한 일들이 거꾸로 남성에게 일어난다.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인 생리, 임신, 출산은 여성의 특권인데,
남자들의 남성성은 부끄러운 것으로 억압의 대상이 된다.
남성들은 사회적 약자로서, 인간의 기본 권리를 얻기 위해 외로운 투쟁을 해야 한다.
우리의 언어는 가부장제에 기반을 둔 남성중심 언어체계를 가진다. 반면에 책에서는 모계사회 언어체계를 갖춘 이갈리아의 신조어가 사용된다. ‘맨과 우먼’을 대신해서 ‘움(여성)과 맨움(남성)’이 쓰이고, 가사와 육아 담당인 남편을 ‘아내’라는 말 대신 ‘하우스바운드’라 칭한다.
아이의 아빠라고 여자가 인정할 때, 남편이 얻게 되는 혜택과 의무는 ‘부성보호’이다.
따라서 남자들은 재력이 있는 여성의 부성보호를 받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이 밖에도 ‘하느님 아버지’를 ‘하느님 어머니’로 표현하는 등 모든 권력과 문화가 여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중심에 여자가 있다.
현실 미러링 효과
여성이 지배세력인 세계에서는 남자들이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여성이 브래지어를 하듯 남자가 성기를 보호하는 ‘페호’를 입는다. 남자를 상징하는 신체적인 특징이나 남성성을 열등한 것으로 치부한다.
파티에서 소년들은 움의 선택을 받기 위해 한껏 차려 입고 그녀들을 기다린다. 움의 선택을 받지 못한 남자들은 구석자리에 앉아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모든 성적 행위 일체도 여성이 주도적으로 리드한다. 남자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따르며, 성교 시 체위도 남녀가 뒤바뀐다. 여자가 임신을 원치 않을 때는 남자가 피임약을 먹어야 하고, 임신의 책임은 전적으로 남자가 져야한다.
남자는 집에서 가사와 육아를 맡고, 여자는 사회활동을 해서 생활비를 벌고 권력을 행사한다. 일과를 마치고 여자가 퇴근해서는 안락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고, 남자는 차나 과일을 준비하며 여자에게 깍듯이 서빙을 한다. 남자들은 모였다하면 수다를 떨며 자기들의 억압된 삶의 고단함을 늘어놓는다.
성의 역할만 바뀐 채, 익숙한 일상이다. 여성들이 한번쯤은 상상해 보았을 일들이 그대로 현실로 펼쳐진다. 그런데 통쾌하거나 재미있다기보다 왠지 불편하다. 가부장제 사회와 모계사회 특성에 따라, 모든 가정의 풍속도가 획일적으로 똑같다는 데서 오는 불편함이다.
남성이 이 책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너무 과장되게 구성되었다고 할 것이다. 여성에게 따르는 성차별은 물론이고 나아가 역차별 문제까지,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년 문제, 다문화 가정, 장애인과 성소수자의 인권문제 등이 다 그렇다고 보인다.
현실은 아직도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피해 사례들이 가려진 채 양산되고 있으나, 제대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여성운동가로서 이 소설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성차별의 편견과 고정관념의 해악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묻는다. 이 땅에서 우월한 주체세력으로 태어나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반대로 다른 쪽은 부당하고 억울한 입장을 제대로 하소연할 데가 없다.
이갈리아 딸들이 전하는 메시지
역지사지의 옷을 입고 답답한 현실을 느끼며, 이갈리아의 세계를 여행한다. 자신이 직접 당해보지 않고는 상대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뻔한 사실도 직접 겪어봐야 심각성을 느낀다. 웬만한 시위나 집단행동으로는 먹히지 않는다. 하늘의 구름처럼 남일일 뿐이다. 욕을 먹고 매를 맞더라도 큰 제스처로, 전폭적으로 몸을 던져 '간에기별'이 간다.
작가는 ‘여성의 집’과 ‘매맞는 여성의 쉼터’에서 직간접적으로 피해사례를 접하며, 또나름의 방법으로 '여성해방 운동'을 부르짖은 것이다. 체질화된 고정관념을 흔드는 힘은 ‘역지사지’만이 대안이라는 생각으로 소설을 구상하고 집필한다. 한발 더 나아가 인종과 종교로 인한 갈등, 장애인과 성소수자 및 동성연애자들의 인권보호까지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숙고하여 문제를 풀어가자는 해법을 제시한다.
혹자는 말한다.
“나는 남자가 여자 입장이 한번 되어보면 어떨까를 자주 생각해 본다.
여자들이 왜 그렇게 억울하다고 말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남자에 대해 적대감까지 갖게 되는지를.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으며 나는 너무나 통쾌했다.”
작금의 현실은 예기치 않은 사건사고들로 격변하고 있다.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해서 각계각층 의식 있는 사람들의 동참으로 많이 개선되고 있다. 특히 페미니즘 운동, 미투 운동 이후에는 여성의 권익보호와 성차별 해소,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지원 등이 나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구석구석 도움의 손길이 미치기에는 역부족이다.
따라서 ‘이갈리아의 사회’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인공 페트로니우스를 통해서 전달되는 목소리는 진중하고 무겁다. 결말 부분에 언급한 액자 소설을 살펴보자.
“맨움은 생명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단다. 그들은 자손과 육체적 연결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죽으면 세상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단다. 맨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땅의 생명이 죽어 없어질 거야.”
<이갈리아의 딸>이 모계사회라면, 액자소설은 가부장제 사회다. 액자소설은 사실상 ‘움과 협력할 수 없는 맨움 해방연맹 전체의 무능력’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갈리아의 딸’에서 전하는 메시지가, 현실에서 공허한 울림이 될 것을 우려한다.
끝으로, 인상적인 문장으로, 강한 쐐기를 박으며 소설을 맺는다.
‘맨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생명이 죽어 없어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