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 문학동네, 2023)를 읽고

by 도도히

일상에서 양성평등을 실현을 꿈꾸다


"우동 집에서 할아버지가 물었다. “너는 커서 뭐가 될 거니?”슬아는 면발을 들이켜며 집안 여자 어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도 커서 며느리가 되나. 엄마를 보면 고생길이 훤한데. 아니면 할머니가 되나. 할머니는 딱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지 않은데. 문득 맞은 편 할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건강했고 자신 있었고 가진 것도 많았다. 슬아가 아는 어른들은 모두 그의 말을 따랐다. 저는 할아버지 같은 사장님이 되고 싶어요.” 슬아의 대답에 가부장이 크게 웃었다. "


슬아는 근엄한 가부장이 통솔하는 대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집안 최고 권력자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청년시절 무일푼으로 상경하여 가계(家系)를 일군 사장이자, 가부장이다. 슬아에게 ‘커서 뭐가 될 거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저는 사장님이 되고 싶어요’라고 한다. 가녀장의 꿈은 벌써 그때부터 싹텄던 것이다.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자기 정체성을 묻게 되고, 실존과 본질에 관한 철학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가? 왜 이런 환경에서, 이런 시대에, 남자 또는 여자로 태어났을까? 나는 커서 과연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살 것인가? 등등.


1950~60년대만 해도 우리 사회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제가 심하였다. 딸을 낳으면 쓰잘데기 없는 것’이 태어났다하여 윗목으로 내팽개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아들은 귀남이요, 딸은 후남이었다. 여자는 족보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


책이 술술 잘 넘어갔다. 쉽고 재미있게 썼다. 총 38편의 장편(掌篇)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가족의 일상이 시트콤처럼 알콩달콩 훈훈하다. 작중 인물들이 실명으로 거론되어 에세이 같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온 소수자 인권문제나 민감한 성차별 문제를 제기하며 작가의 의도가 분명한 소설임을 눈치 채게 한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깜찍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머리가 가쁜 해지고 기분이 좋았다. 쉽게 읽혔지만 생각할 거리는 많았다.


끈끈한 애정과 신뢰로 이루어진 팀웍(teamwork)


집안의 모든 것이 할아버지 것이어서 부러웠던 슬아, 나이 삼십에 집을 사고 호주가 된다. 모든 살림은 그녀의 지휘 아래 통제되고 그녀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이에 반해 쉰다섯 동갑내기 모부(母父)는 가녀장의 모든 지시를 그대로 따르고 수행하는 고용인들이다. 그러나 이런 체계의 밑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이 있다.


가녀장은 엄마가 자주 말실수를 하지만 무시하거나 짜증을 내기보다는 그 순간을 즐길 줄 안다. 엄마는 노안으로 처음 안경 쓴 남편을 보았을 때 ‘자기야 안경 쓰니까 꼭 인테리어 같다’라든지, ‘딸기쨈이 삼각지대에 있어서 찾느라 한참 걸렸어’라고 한다. 슬아 친구 ‘새롬이를 초롱이, 숙희를 숙자’라고 부르고 ‘천연 효모빵을 천연 호모빵’이라고 한다든지 ‘트럼프 대통령을 트렁크 대통령’ 이라며 주변을 웃겨준다. 이런 실수가 잦으면 짜증이 날 법도 하련만 가녀장은 그러려니 하며 늘 정확한 단어로 고쳐준다. 또한 그것을 글감으로 사용하여 유쾌하게 풀어내는 귀여운 글쟁이다.


쉰다섯 웅이는 슬아의 아빠이자 출판사 비정규 직원이다. 양쪽 팔뚝에 청소기와 대걸레 문신을 새겼다. 몸과 마음속에 이미 그의 굳은 결의를 새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출판사 안팎의 청소는 기본이고 운전, 배달, 택배 발송, 세금 처리 등 만만치 않은 일을 수행한다. 이런 일을 하면서도 가녀장에게 존칭을 써가며 극진히 모신다. 어린 딸이 기특하고 듬직해서 잘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표현일 것이다. 주변 모든 사람들은 어려울 때면 으레 그를 찾는다. 조카나 딸 친구들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꼭 그를 찾고 조언을 구한다.


복희는 가녀장의 어머니이기 전에 출판사 핵심 동료다. 그리고 사내 유일한 정규직 직원이다. 복희도 웅이 못지않게 다양한 경험과 능력을 가진 커리어 우먼이다. 마트직원, 식당 종업원, 빵집 점원, 구제옷 장수 등 안 해 본 일이 없다. 게다가 열한 명이나 되는 대 가족의 가사를 도맡아 왔었다. 근엄한 시부 아래 혹독한 가부장 살이를 견뎌낸 내공이 있다. 가족 건강을 위한 주방 일을 비롯해서 집 안팎의 핵심 업무를 대부분 그녀가 처리한다. 가녀장에게 오는 인터넷 게시판 댓글까지 담당한다. 역시 최고의 집안, 최고의 가족이다. 이런 가족의 희생과 헌신이 있기에 가녀장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가사노동에 대한 소중한 가치 부여


‘가녀장의 시대’는 가부장제의 잘못된 인습과 부당한 권위를 깨고 새로움을 추구한다. 오랜 세월 무보수로 당연시해 온 가사 노동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에 상응하는 물질적 보수를 지급한다. 가부장 사회에서는 육아나 가사노동은 여자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가녀장은 바깥 일 못지않게 집안일의 노고와 가치를 인정한다. 가부장 시절에는 턱도 없을 일이다. 이는 가녀장이 성공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이와 같이 전업주부의 노동력에 가치를 매기고 존중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아직도 개선되지 않은 측면이 있어 이 작품의 메시지는 크고 중요하다. 가사노동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재고해야한다.


또한 자녀가 경제력이 있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지시하고 떠 받들려진다고 생각하며 부정적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지고 해결할 사람이라면 실제로 가장 이상의 핵심요원이다. 당연히 그 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부모보다 높은 위치에서 그들의 상관으로 군림하는 그녀가 굳이 ‘가녀장 시대’를 선언한 기저에는 가정을 책임지고 이끌겠다는 효성심의 발현이라는 것을 독자들은 알아챌 것이다. 그런 만큼 가녀장은 가족과 지인들을 배려하고 품어주는 넉넉함이 있다.


양성평등 사회 실현


그녀의 단어들은 신선하고 깜찍하다. 작품 속 출판사 이름은 ‘낮잠 출판사’이다. ‘낮잠’ 이라니……. 여러 가지 상상을 유발하는 재미있는 표현이다. 실제로 작가는 ‘헤엄’ 출판사 대표이다. ‘헤엄’이란 말도 다분히 함축적인 뜻을 내포한다. 언어란 사회성을 지니고 있어서 낯선 조합이거나 신조어일 때 거슬릴 수 있다. ‘가녀장(家女長), 모부(母父)’라는 언어들이 그렇다. 또한 부녀간에 맞담배 피우기, 지시체계의 역방향성 등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다양할 수 있다. 우리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규범을 거스르거나 상식에 어긋나는 행태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반면에 이러한 새로운 어휘사용이 창의적이고 신선하게 느껴져 매력적이라고 추앙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생방송 인터뷰에 나가면서 노브라를 하고 출연한 것도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다. 아직 우리 사회는 공식적인 자리에 노브라 출연은 무사(無事)하지 않다. 그러나 작가는 남녀 성차별이라고 소리를 낸다. 왜 남성들의 유두는 괜찮고 여자들은 문제인지 따진다. 개인적으로 나는 작가의 생각을 존중해주고 싶다. 방송국 PD와 논의 끝에 유두만이라도 어떻게 하자는 의견에 끈적한 니플 패치를 꽉 구겨서 주머니에 쑤셔 넣는 모습이 쿨했다. 그런 용기가 있어서 고정관념의 높은 벽이 조금씩 깨진다고 생각한다.


톡톡 튀는 MZ 세대, 젊음은 그런 것이다. 누구라도 완벽한 인간은 없다. 앞서가면서 욕을 먹는 자가 있기에 이 사회에 희망이 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작가가 꿈꾸는 세계의 메시지를 읽게 된다. 그녀는 인종이나 성별로 인한 편견이나 차별이 없는 사회, 여러 분야에 걸쳐 소수 인권이 존중되는 평등 사회 실현을 꿈꾼다.


우리나라는 1998년 처음으로 여성을 위한 기본 정책이 수립되었다. 2001년에는 여성가족부가 출범했고, 성차별 해소를 위한 여러 제도적 개선이 모색되었다. 호주제 폐지와 여성의 경력유지를 위한 지원과 노력이 그것이다. 2015년 양성평등을 바탕으로 기본계획을 개정하였고, 지금은 여성의 지위 향상 단계를 넘어 양성이 함께 성장하는 양성 평등정책으로 변화하였다. 그럼에도 여성의 경력 단절이나 고용상 성차별, 일과 생활 사이 불균형 등 아직 개선되어야할 부분은 많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작가는 평등사회 실현을 꿈꾸며 메시지를 전한다. ‘작은 책 한권이 가부장제의 대안이 될 수는 없지만 무수한 저항 중의 하나’가 되기를 바라며, 사랑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했던 구시대가 지나가고, ‘한 번도 권위를 가져 본 적 없는 딸들의 시대’를 지나서, 이제 ‘새 시대가 도래하기’를 꿈꾸며 이 가족 드라마를 썼다고 한다.


어떤 환경에서나 가장이 된다는 것은 힘들고 고단한 일이다. 또한 누가 가장이 되든지 그 나름의 특징과 장단점은 있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며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협력한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따라서 새롭고 획기적인 변화와 다양성을 추구하는 시대에, MZ 작가의 더욱 도발적이고 깜찍한 작품들이 속속 출판되길 기대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몸과 여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