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기 의지와는 다르게 불공평하다. 싫든 좋든, 타고난 운명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며 살아야 한다. 태어나는 순간 모든 것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어떤 유전자를 가지고,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서 큰 차이가 있다. 누군가는 ‘운칠기삼’이란 말을 한다. 타고난 운이 ‘7’이라면, 자기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3’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삶은 부조리하고 모순투성이다. 하지만 절망하긴 이르다. 행복의 기준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행복은 이런 것이다.’라고 쉽게 운운할 수는 없다.
청소년기 방황의 원인은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인간이 무슨 존재인가 묻게 되고, 자신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에서 시작된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왜 이런 가정에서, 그런 부모 아래 태어났는가. 사후의 세계는 정말 있는 것인가. 이런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혼돈 속에서 끝없이 고민을 거듭한다. 종교와 신앙에는 답이 없다. 신이란 믿으면 존재하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기도의 응답은 멀고 현실은 칙칙하고 남루할 뿐이다.
나이가 든다고 삶에 대한 회의와 번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쫓기면서 계절은 무섭게 흘러간다. 하지만 삶은 순탄하게 흐르지 않는다. 하나의 어려움을 넘기면 또 다른 벽이 우뚝 막아선다. 문제 해결은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일 뿐. 그렇게 뭔가에 쫓겨서 살다보면, 많은 것들을 체념하게 된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산다.
고등학교 때, 호라티우스의 싯구를 읊조리면서 스스로 위로를 받았다.
“행복하여라. 홀로 있으면서도,
오늘을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내일은 최악의 것일지라도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오늘 이토록 충실한 삶을 내가 누렸으니.”
노력을 해도 쉽게 결과는 나타나지 않고 현실이 암담할 때 이 시를 읊조리며 위로를 받는다. 눈에 보이는 결과보다 그날그날 최선을 다하는 데서 만족을 얻자고. ‘내가 이토록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데, 결과가 아무려면 어떠리. 자족해야지’라는 심정이었다.
삶이란 꽃길만 걷는 것도 아니고 죽도록 진흙탕만을 헤매는 것도 아니다. 살다보면 젖은 길이 끝나고, 마른 길도 나타난다. 그래서 고난의 순간에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 여름이 있으면 겨울도 있고,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듯이. 사노라면 누구나 행불행의 시간을 겪는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다고 희희낙락하거나, 힘들다고 죽는소리를 내지 않는다.
고통의 순간에 ‘불행도 재산’이라는 말을 기억한다. 이 고통도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고, 이것이 행복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 숱한 실패와 상처, 어둠의 순간들이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단단하고 강하게 만드는 기초공사라고 생각하며. ‘불행이나 실패’를 미래를 위한 저축이라고 생각하면 순간 힘이 된다.
따라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즐기라는 말이 있듯이. 호라티우스의 말처럼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갈 때, 지난날의 ‘불행’은 오늘의 ‘재산’이 되고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카르페 디엠!’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하루를 즐기며 살자.
행복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오늘 하루는 어제 죽은 사람의 꿈같은 소망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소중하다. 하루하루 평범한 순간이지만, 애틋하고 간절하며 기적 같은 시간이다. 인간은 제 손에 쥔 것은 귀한 줄 모르고, 남의 떡을 크게 느낀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밖을 헤맸으나 돌아와 보니 자기 집 새장 안에 있더라는 동화가 있다. 가진 것에 감사하며 분수를 알고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많은 철학자, 석학들은 행복을 논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에 따라 덕을 실현하며 조화로운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에 닿는다고 말한다. 동양에서 말하는 행복론도 비슷하다. 사서삼경 『대학』 편 서두에 실린 말이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며, 지극한 선에 이르는 데 있다.” 라고 한다. 스스로 덕성을 깨우치고 닦으면 가정이 화목해진다. 가정이 올바르면 나라는 바르게 서고, 나라는 평화로운 세상으로 이어진다. 행복은 이렇게 개인의 마음에서 세상으로 퍼져가는 물결이다.
우리 집의 모든 실권은 나에게 있다. 내 기분에 따라 그날 가족의 기상도가 달라진다. 그래서 즉시 화를 내기보다, 한 박자 쉬며 생각을 하며 방법을 찾는다. 젊은 시절에는 그렇지 못했다. 아니다 싶으면 즉각 담판을 져야 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하면 서로 기분만 상하고 한참동안 그대로 평행선을 긋게 된다.
나이 들면서 생긴 여유다. 할 말을 어떤 식으로 전할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루 이틀 지난 후, 가족 톡방이나 간식 타임에 넌지시 운을 뗀다. 그러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말의 씨가 먹히고 결과도 좋다.
서은국 교수는 『행복의 기원』에서 삶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 ‘생존’이라고 역설한다. 즉 인간은 ‘생존’만이 절대 절명의 목표요, 인생 과제라는 것이다. 어떤 만족의 상태도 순간이요, 지속성이 없으며, 꿈같은 현실일지라도 죽은 다음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행복하지 않더라도 존재함만이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건강하게 존재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볼 수 있다.
매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며 행복의 조건이 된다. 행복은 먼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오늘의 삶 속에 깃들어 있는 경험과 의미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누구는 음악을 들으며, 누구는 그림을 그리며, 또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여행을 다니며 행복을 꿈꾼다. 이런 작은 경험 속에서 마음은 반짝이고, 삶의 기쁨이 피어난다. 욜로족의 말처럼, “한 번뿐인 인생, 지금 즐기자.” 오늘 맛보는 음식, 여행, 취미 속의 작은 기쁨이야말로 삶을 살아있게 하는 힘이다.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행복은 결국 지금 내 곁에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프랑스 정신과 의사가 쓴 『꾸뻬씨의 행복 여행』에서 주인공은 행복을 찾아 전 세계를 떠돌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행복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경험하며 행복 노트를 적어 나간다. 그는 행복이란 남과 비교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커진다고 한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때로 불행을 경험해야 행복을 더 깊이 알 수 있다고 깨닫는다. 즉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을 기원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단순한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나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스쳐가는 주변의 작은 변화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아침이면 거실 깊숙이 들이치는 밝은 햇살이 좋다. 흐린 날의 짙은 안개도 낭만적이다. 창문 너머 먼 하늘 위로 떠가는 구름조각과 처연한 달밤도 소중한 친구가 된다. 비오는 날 줄기차게 울어대는 맹꽁이 울음소리, 한여름 가로수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도 추억의 한 소절이 된다. 이렇게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들이 나의 그림책이 되고 나를 성숙하게 한다. 매일 우리를 놀라게 하는 크고 작은 뉴스나 개인사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감사한다.
행복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내 안의 덕을 깨닫고, 불행조차도 포용하며 내일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 자기의 분수를 알고 오늘의 삶에 감사하며 사랑하는 이들과 나누는 평범함 속에 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행복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파랑새는 영원히 내 집 새장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