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문학동네 2011)를 읽고

by 도도히

상실감과 고독, 그 벼랑 끝에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요,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그가 말하는 궁극의 삶이란? 가장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도 끝내 희망을 찾지 못해, 마지막 비상 끝에 떨어져 죽는 새의 모습이다. 이것이 그의 현실이고 마지막 결단이었다. 레지스탕스로, 혁명가로 살아온 작가의 삶이 투영된 소설이다. 마흔 일곱의 남자는 스스로 ‘알만한 것은 다 아는 나이’라고 자조 섞인 독백을 한다. 스스로 세상에서 맵고, 쓰고, 단 맛을 다 경험한 사람이다.심신이 지칠대로 지쳐 무력한 상태다.


‘새들은 페루로 가서 죽다’는 16편의 단편 중 대표작이다. 제목만으로도 이미지가 연상되고 서사가 느껴진다. 아름답고도 쓸쓸한 롱비치와 안데스 산맥의 위용이 펼쳐진다. 바닷물에 빠져 죽으려는 여자를 살려내니까 ‘이곳에 머물게 해 주세요’라고 여인은 말한다. 화자는 그 순간 그녀와 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 말은 화자의 또 다른 내면의 소리였으니까. 세상 끝으로 내몰린 자는 누군가에 기대어 살고 싶으리라. 그럼에도 모든 인물들의 라스트는 다 부서진 채 죽음으로 끝이 난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는 정권에서 밀린 독재자가 벼랑 끝에 내몰려 목을 매고 자살을 한다. ‘벽’에서도 연말연시 삶에 지치고 세속에 환멸을 느낀 젊은 남녀가 벽을 사이에 두고 고독한 생을 마감한다. 이처럼 인물들은 짙은 허무주의에 빠진 패배자의 모습이다. 그들에게 생은 외롭고 힘겹고 무의미하다. 더 이상 재기불능인 피폐한 영혼들이다. 삶이 지겨워서 권총자살로 생을 끝낸 작가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인간의 본능, 사랑, 탐욕

‘고상함과 위대함’은 본능적인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다. 이웃에 사는 친구가 어린 딸을 건드려 임신을 시킨다. 아버지는 친구를 죽이려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딸은 그 사실을 내연의 아저씨에게 알리고 약혼자에게 자기는 그 아저씨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나이도 경계도 없이 본능적으로 직진이다. 들불처럼 속절없이 타오르는 짐승의 본능이다.

‘킬리만자로에는 모든 게 순조롭다’에서도 사랑하는 여자의 말 한 마디에 고향을 떠나 한평생 이중적인 삶을 사는 인물이 나온다. 탐험가, 정복자를 좋아한다는 여자의 말에 탐험가인 체 세계 각지에서 엽서를 보내고 그녀와 우편으로 교신한다. 그는 사랑의 고수다. 세계 각지를 떠도는 선원들을 매수해서 세계 각지에서 엽서를 보내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또한 ‘본능의 기쁨’에서는 인간의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탐욕을 그린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인면수심의 탈을 쓰고 타인을 이용하고 짐승이하의 괴물 취급을 서슴지 않는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의 끝은 어디인가. 인간의 본능은 독하고 무섭다. 기적을 일으킨다.


극도의 이기심, 잔인함, 폭력성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에서는 가스라이팅을 당한 유대인의 이야기다. 그는 개명하고 신분을 위장한 채 숨어사는 인물이다. 나치의 폭력으로 손톱이 빠지고 이가 빠진 몰골이다. 독일은 패망했고 더 이상 게슈타포는 존재하지 않아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유대인을 색출하기 위한 책략이라고 우긴다. 철저히 가스라이팅 된 것이다. 그리고 수용소 고문 기술자였던 나치 친위 대원에게 매일밤 음식을 나른다. 인간의 잔인한 폭력과 상처에 관한 슬픈 이야기다.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그 위에 업히는 놈’은 교활한 인간의 이기심을 그려낸다. 주인공은 계산적인 문명사회를 벗어나 섬으로 간다. 섬사람들은 돈을 모르고 순박해 보였다. 고갱의 그림을 과자 포장지로 쓰는 것을 보고 놀란다. 그는 상인 여자에게 거의 강압적으로 돈을 주며, 고갱의 모든 그림을 가지고 섬을 나선다. 그러나 폭풍으로 배가 묶이고 섬에서 며칠 묵게 된 그는 그림이 전부 가짜임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관광객이 당한 일은 통상적인 일이었다. 순박한 척 연기를 한 것이다. 도시든, 섬이든 '나는 놈 위에 업히는 놈' 천지다.

‘몰락’은 영화 ‘대부’가 연상되는 작품이다. 사업체를 가진 폭력배들. 입맛에 맞지 않는 상대는 산 채로 시멘트를 부어 조각품을 만든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끝판 왕이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동상은 한때 같은 패거리의 수장이었던 전설의 인물이다. 같은 멤버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총살을 당하고 시멘트 동상이 된다. 모두가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는 조각은 '총에 맞아 입을 벌리고 두 팔을 저으며 허우적거리는 모습의 동상'이다. 모두가 두려워 떠는 상징적인 거리에 세워져, 폭력배들의 산 교과서가 된다. 그 동상을 목격한 사람은 치를 떨며 경악한다. 전설적인 인물의 걸작이다.

그 밖에도 온몸을 성형으로 개조하여 자연 미인을 찾기가 어려워진 요즘시대에는 맞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무언가에 집착하면 편견을 갖게 되고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메시지도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미의 기준도 달라지고 삶의 가치도 바뀐다. 타당한 이론도 상황에 따라 적용되는 개념이 달라져야 한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마지막 작품은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이다. 미래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갈수록 욕망이 커지는 인간이 이상한 생물로 진화한다. 새로운 평화를 위해 과학의 힘으로 진화한다. 가능한 이야기이다. 피조물로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자하는 상상이다. 따라서 인간은 ‘생선, 구더기, 파리’를 먹고 ‘집게발, 더듬이, 촉수, 꼬리, 지느러미’를 달고 수륙을 자유자재로 왕래하며 살아가는 흉악한 괴물이 된다. 그리고 결국 ‘바다 속에서 불멸의 가치를 수호’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미래사회는 비늘과 지느러미를 달고, 게, 거미, 거북이 모양을 가진 모습의 괴물이 미래사회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하면서 작가는 펜을 놓는다.


세상 끝으로 새들이 날다

기대했던 것보다 작품을 읽고나서 우울감을 느꼈다. 여기서 새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나약한 인간을 의미한다. 바람 속을 뚫고 세상 곳곳을 헤매며 살지만 상처받고 절망하는 폐인들이 연상된다.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겪은 사회는 온갖 모순과 부조리의 온상이었다. 전쟁과 살육의 현장에서 피폐해진 작가에게 삶은 무의미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작중 인물들은 인간사회의 욕망과 이기심에 처절하게 버려지고 쫓기며 좌절을 맛본다. 그들은 극도의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에 빠진다. 이 모든 삶에 진저리가 난 작가의 마지막 선택은 스스로 절명하는 것이었다. 작품을 읽다보니 독자도 허무주의에 동화되고 우울해진다.

김환기의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장면이 떠오른다. 어둠 속 작은 한 점으로 표현되는 무수한 인간 군상들이 명멸하다가 사라진다. 인생이란 어스름 박명 속에서 짧은 희로애락을 느끼다가 사라질 뿐이다. 혹자의 말처럼 ‘운칠기삼’의 불공평한 삶에 치이고 내몰려 활력을 잃기도 한다. 새들은 세상 끝으로 날아가 생을 마감한다. 푸른 안데스 산맥에 둘러 싸인 망망대해,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에 새들의 주검이 점점이 찍힌다. 파닥이는 새들의 잔상이 오래 남는 작품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침 그리고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