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 자런, 알마출판사, 2018)
「랩 걸 Lab Girl」은 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인 호프 자런이 자기의 성장과정과 과학자로서 살아 온,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쓴 글이다.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이라는 부제가 달린 자전적 산문으로, 소설 쪽에 가까운 글이다.
호프자런은 과학도로서, 삶을 성실하고 진실하게, 일관된 자세로 살아간다.
책장을 열면, ‘내가 쓰는 모든 글은 어머니께 바친다.’라는 문장이 눈에 띤다.
서문에는 헬렌 켈러의 말이 실린다.
“ 더 많은 것을 만져보고, 그들의 이름과 용도를 알아갈수록 나는 더 기쁨에 넘쳤다. 그렇게 얻은 자신감은 내가 세상과 밀접히 관계를 맺은 존재라는 느낌을 강하게 만들어갔다.”
예런 역시 헬렌 켈러처럼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자연을 알아가며 전율을 느끼고 기쁨에 떨 것이다. 사람이 무언가에 빠져서,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한다는 것은 축복이고 행운이다. 예런에게 자연은 사랑의 대상이었고, 삶의 전부였다.
‘Lab’은 그녀의 작은 실험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공간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자연 전체가 그녀의 연구실,‘Lab’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엄청나게 많은 이파리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직업이다.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질문을 한다. 제일 먼저 책을 보고. 정확히 어떤 종류의 초록인지, 위쪽과 아래쪽이 다른 색인지 가운데와 가장자리는 어떤 상태인지 부드러운지 뾰족뾰족한지 잎에 수분은 얼마나 차 있는지 주름져 있는지, 싱싱한지 잎과 줄기의 각도? 내 손바닥보다 큰지 작은지’(P.11)
이파리 하나를 관찰하면서도, 이렇게 많은 궁금증과 관심과 사랑을 보인다. 삼중고의 장애를 가진 헬렌 켈러가 수없이 더듬어 보고 상상하며, 자연을 인지해 가는 모습과 흡사하다. 그녀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그렇게 섬세하고 특별하다.
자연을 사랑한 어느 시인이 떠오른다. 그녀는 한 그루의 나무에 나뭇잎이 과연 몇 개가 달렸을까 호기심에, 나무 가지위에 올라가 하루 종일 나뭇잎을 헤아렸다는 대목이 연상된다.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에 미치는 일이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1부 뿌리와 이파리, 그녀의 대학 시절을 지칭한다. 학교를 다니면서 여러 가지 알바를 하고 대학연구실에서 교수의 일을 도우면서 지냈다.
2부 나무와 옹이는, 사회초년 시절이다.
졸업을 하고, 직장을 옮겨 다니면서 삶의 경험과 영역을 넓히는 시기이다.
3부 꽃과 열매는, 결혼과 출산, 종신 교수직으로 확고한 삶의 터전을 잡는 시기이다. 나무의 각 부분에 사람의 일생을 빗대어 표현한다. 이렇게 나무의 생리와 인간의 삶은 서로 닮았다는 것이다.
예런은 자신과 평생의 연구 파트너가 되는 빌(Bill)을 만나, 함께 실험실을 꾸린다. 둘은 연구비가 부족해서 장비를 직접 손보며 함께 고난을 견딘다. 그들에게 과학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이성간이지만, 특별한 우정을 보여준다. 오랜 세월을 동고동락하면서 정이 들어서, 그들의 관계는 특별했다. 서로 가정이 있음에도 가족 이상의 진정한 우정을 보여준다. 서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같은 데서 오는 자연스런 감정이었다.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이성간에 진정한 우정이 성립할 수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성간의 우정이 가능하고, 인간적인 우의와 사랑은 더욱 아름답고 감동적임을 알 수 있다.
남성에 비하여 여성은 사회활동을 하기에 신체적으로 불리하고,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특히 그녀는 결혼과 출산, 조울증과 같은 삶의 굴곡을 겪으며, 연구활동과 삶의 균형에 대해 고민이 깊었다. 흔히 직장을 가진 여성들이 겪는 고충이다. 오죽하면 현실적으로 경력단절을 우려한 여성들이 비혼주의를 고집하거나, 딩크족이 되는지 공감이 간다.
한 그루의 꽃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꽃을 피우듯, 인간 또한 모든 역경을 딛고, 온갖 상처 속에서 열매를 맺고, 결실을 얻는다. 라이너 쿤체의 싯구가 생각난다.
'꽃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
자갈 비탈에서도 돌 틈에서도
어떤 눈길 닿지 않아도'
그녀는 평생 과학도로서 자연을 연구하고 초목을 관찰하며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들을 찾아내어 이름을 붙이는 삶을 살아간다. 우울증을 앓고,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다시 일어서는 의지를 보여준다.
'자갈 비탈이나, 돌틈에서, 어떤 눈길 닿지 않아도' 그녀는 꿋꿋하게 꽃을 피운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법을 연구하며 평생을 바친다. 모든 식물들을 각기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생태적 기능에 따라 돌보고 가꾼다. 이러한 그의 인생은 과학적 성취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느끼게 한다.
누군가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답의 길을 걸으면서, 어떤 결실을 얻는다는 것은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토대로 한다. 그래서 선구자의 길은 고독한 것이다. 실패와 어둠을 견디는 힘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녀에게 어둠을 건너는 힘은 나무에 대한 사랑, 더 나아가 자연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에게 그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자연의 순환과 인생은 닮은 꼴이다. 그래서사람의 일생을 사계절에 비유하곤 한다. 또한 날씨에 따라 인간의 기분이 출렁거린다. 장마철 오락가락 흐린 날씨는 우울하고 답답하다. 오랜만에 창문을 활짝 열고 선선한 계절을 가득히 안으로 들인다. 일없이 콧노래가 나오고 기분이 쇄락하다.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자연과 인간, 실패와 회복을 통한 인간 성장의 기록이다. 실험실은 단지 과학 실험실을 의미한다기 보다,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 가는 삶의 연구실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