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M. 쿳시, 문학동네, 2019)
‘검은 대륙을 적시는 13월의 붉은 비’
J.M. 쿳시는 1986년 어머니를 잃고 1988년 아버지가 사망한다. 이어 1989년에는 아들마저 떠나보낸다. 이 시기야말로 가족과의 사별로 작가 개인적으로 외롭고 힘든 시기였다. 게다가 당시 남아공의 분위기도 극히 혼란스럽고 불안한 상태였다. 오래 전 유입된 유럽인 지배층으로 흑인의 탄압이 기승을 부리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시기 즉 1986년 쓰기 시작하여 1989년 집필을 끝마친다. 작가는 화자인 ‘나’를 통하여 목격한 사실과 경험을 편지글로 기록하여 미국에 사는 딸에게 편지를 보낸다. 자유연상으로 과거의 추억과 현실이 섞이며, 딸에게 말하는 형식이다. 또는 독백 투로 자신 자신에게 말을 거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배경은 흑인 탄압정책 아파르트헤이트에 주민들이 거세게 반대하고 저항하여 나라 안이 분쟁에 휩싸인다. 화자는 백인의 수혜자로 성장하여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강의하였다. 그러나 퇴직 후 암 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아간다. 이미 고인이 된 남편과는 오래전에 이혼을 했으며 하나 뿐인 딸은 미국으로 이민을 간 상태이다.
도입부분은 가사를 돕던 플로렌스가 자기 가족을 방문하러 집을 비운 사이, 화자는 병원에서 ‘암세포가 뼛속까지 침투’했다는 진단을 받고 귀가한다. 그때 차고 뒤 빈 종이박스 속에서 자고 있는 노숙자 퍼케일을 발견한다. 그녀는 ‘노숙자 퍼케일이 죽음을 앞둔 자기에게 길을 안내해주기 위해 찾아온 천사’(p.215)라고 직감한다.
그리고 무너져 가는 삶 앞에서 자신의 피폐한 노구(老軀)와 떠돌이 노숙자의 삶을 동일시한다. 이전 같으면 화자는 퍼케일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쫓아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저하게 혼자 남은 그녀는 그와 말을 트고 먹을 것을 나누며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된다. 혼자 죽으란 법은 없나보다. 생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삶의 동반자를 만난 것이다. 먼 곳에 있어 필요한 순간 곁에 없다면 핏줄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들의 관계를 보며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이 나라에서 사는 것은 가라앉고 있는 배, 구멍 난 보트의 낡은 정기선 같다.”(p.33)
연일 흑인들의 폭동과 정부의 무력 진압으로 플로렌스는 15세 아들 베키와 그의 친구 존, 그리고 두 딸을 데리고 돌아온다. 학교가 폐쇄되어 갈 곳이 없어진 청소년들은 어디에서나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교 교육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을 만드는 교육, 지배층의 권력유지를 위한 맞춤교육이라 생각한다. 학교와 마을은 불에 타고 화염에 뒤덮인 채 아수라장이다.
화자는 베키의 실종 소식을 듣고 플로렌스를 찾아가 현장을 목격한다. 눈을 뜬 채로 죽어간 어린 베키의 주검과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시체들을 보며 경악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들이 일상인 듯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진압세력과 막후 위정자들의 패악(悖惡)을 보며 화자는 미치광이처럼 통렬하게 울부짖는다. 인간으로서 절대로 용인할 수 없는 비극이라고 심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불이라도 질러 타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처해 있는 추한 상태로 죽을 수는 없으며 구원받는 길을 모색한다. 구원받는 길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걸 함으로써 가능하며 사랑하지 않는 걸 사랑해야 한다’고 느끼면서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존을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한다.’(p175)
‘삶은 발가락, 이빨 사이에 낀 먼지거나 물에 빠져 죽는 일이며 물속 바닥까지 떨어지는 일’(p.248)이라고 격정적으로 말한다. ‘뿌연 연기로 뒤덮여 있는 현실 속에서 자신은 불에 타고 있노라고. 그렇게 삶이란 하찮고 한없이 추락하는 것’(p.52)이라고 그날을 기록한다.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는 흑인들의 삶은 기구했다. 커런 부인의 가사 도우미 플로렌스, 15세의 나이로 죽은 아들 베키와 그의 친구 존, 아무런 희망이나 의지 없이 떠도는 노숙자 퍼케일, 이들이 바로 남아공 흑인집단을 대표하는 캐릭터이다.
마을이 통째로 불타고 매일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현실은 샤프빌 학살을 연상시킨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것들을 박탈당한 채 제한된 지역에서 국적도 없이 살아야 했다. 그들이 누구인지 본래의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어지지 않는다. 거처 없이 떠돌며 쓰레기를 뒤지고 역한 냄새를 풍기며 살아가는 존재다.
작가는 철의 시대를 거슬러 청동시대를 거쳐 흙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파 한다. 온갖 생명을 배태하고 소생시키는 흙의 부드러움과는 달리 철의 속성은 차갑고 단단하다. 철(steel)은 쇳덩어리이다. 스스로 부식되어 녹아 사라지기 전에는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
표정이 없고 융통성 없는 기계 같은 인간은 철을 연상시킨다. 화자는 상황이 변하기 전에는 남아공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떠난 딸을 가리키며 ‘그 애는 철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퍼케일은 ‘당신도 철 같아요’(p97)라고 한다.
철은 생명을 살리지 못한다. 타인을 품어 줄 부드러운 흙 가슴이 없다. ‘철의 시대와 청동의 시대를 거슬러 점토와 흙의 시대 같은 더 부드러운 시대가 순환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 있는 걸까?’(p66)라고 물으며 작가는 ‘철의 시대’를 사유한다.
‘철의 시대’란 인종, 종교, 이념, 성적(性的) 갈등과, 물질 만능주의, 극도의 이기주의로 차가운 모든 대립과 단절을 의미한다. 자본이 권력이고 삶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사회,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미래가 없는 사회,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되고 인권이 유린되는 시대, 생명이 없는 불모의 땅이 ‘철의 시대’다. 이러한 시간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요즘의 세태를 가리킨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 불공정과 불의와 왜곡된 진실을 방관하며 오직 실익을 위해기회를 노릴 뿐이다.
백인, 흑인 또는 그 밖의 혈통으로 태어나는 것은 순전히 운명이다.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에서 피지배계층으로 태어나는 것은 인간이 아닌 신의 영역이다.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절대적인 비극이다.
화자와 퍼케일은 흑인과 백인, 늙고 병든 노구와 아무 것도 없는 부랑자로 서로 대립되는 인물이다. 그래서 도저히 섞일 수 없는 관계였으나,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고,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자연스레 가까워지고 모든 걸 함께 공유하게 된다.
화자의 말년에는 매일 장을 봐 오고 요리를 해주며,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그녀의 죽음이 가까워올수록 그는 더욱 충실해진다.
화자는 퍼케일에 대해 딸에게 편지를 쓴다. ‘우리는 반으로 접은 종이처럼, 접힌 양 날개처럼 포개져 침대를 같이 쓴다. 결합된 사이, 부부사이인 오랜 친구, 함께 자는 친구’(p.240)라고. ‘그는 코를 곤다. 네 엄마는 그림자 남편 곁에서 이 글을 쓴다. 이 모습이 불쾌하게 느껴진다면 나를 용서하렴. 사람은 가장 가까이 있는 걸 사랑해야 한다.’(p.241)라고.
마지막 장면이다. “나는 침대 속, 차가운 시트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내 곁으로 들어왔다. 처음으로 나는 아무 냄새도 맡지 못했다. 그는 나를 품에 들이고 굉장한 힘으로 끌어안았다. 그래서 숨이 내게서 훅 빠져나갔다.” (p.251)
커런 부인은 퍼케일의 품안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이 장면에서 독자는 작가의 희망적인 메시지를 읽는다. 이것은 흑인과 백인, 있는 자와 없는 자, 주인과 피고용인의 갈등과 대립 구도를 벗어나 한 몸, 한 덩어리가 된다. 도저히 섞일 수 없는 흑백이 만나 친구, 부부, 가족이 되어 서로 상생하고 화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