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길, 문학동네, 2019)
작가는 201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방〉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작가는 서스펜스 장르와 공포물을 좋아하며 2010년 전후 한국 사회에서 청춘을 보냈다. 작가가 ‘셜리 잭슨’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 I am the captain of my fate. Laughter is possible laughter is possible laughter is possible.(나는 내 운명의 선장이다. 웃음은 가능하다.) " -Shirley Jackson
2010년대, 우리 사회는 페미니즘(2017)이 부각되고 ‘미투’운동이 있었다. 성폭력․여성혐오, 남성 우월주의로 피해를 입은 사례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이런 것을 연상시키는 일련의 작품이 ‘호수-다른 사람’, ‘괜찮은 사람’이다.
그녀의 장기인 ‘스릴러 기법’으로 사건을 전개하고 엔딩은 독자들의 추측에 맡기는 ‘열린 결말’을 추구한다. 작품마다 확실한 결말이 없다. 안개 속처럼 모호한 결말이 특징이다. 작품 배경으론 빛이 들지 않는 폐가나 늪지의 음산한 이미지다. 전반적으로 우울감과 불안감이 깔린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는 하나같이 도덕성이 결여된 정신질환자 , 불량배, 전과자, 폭력배들이다.
민영이 호숫가에서 원인 모를 사고로 3주째 의식불명 상태이다. 누가 범인인지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추측이 무성하다. 그래서 흥미롭다. 민영의 남자친구는 겉보기에는 ‘예의 바르고 잘 생겼으며 유머감각이 좋아 분위기를 잘 이끈다.’(p15) 하지만 민영의 팔에 ‘푸르스름하고 둥근 멍자국’을 내고 ‘실수였다’고 말한다. 진영과 함께 호숫가를 간 날 화자의 팔에도 같은 멍자국을 낸다. 그는 낯선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며 섬뜩한 기분이 들게 한다.
또는 버스 안에서 만난 남자는 버스 내에서 욕설로 승객들을 두렵게 한다. 승객들이 다 내리고 둘만 남게 되자 민영은 무서워서 내려야 할 정류장이 아닌, 이전 정류장에서 내린다. 맥주 집에서 집 앞 엘리베이터까지 여자를 쫓아온 남자는 여자 전화기에 번호를 남긴 뒤 자기 전화를 꼭 받으라며 겁박한다.
늘 호수에 나와서 빨래하는 미자네는 남편에게 머리카락을 다 뽑혀서 더 이상 움켜쥘 것이 없다. 빨래하러 나왔다기보다 남편의 구타와 폭행을 피해서 나온다는 후문이다. 전 남친 역시 진영의 목을 졸라 퍼렇게 멍자국을 낸다.
‘벌레들’에서도 남자들은 폭력적이다. 희진은 동거하던 남자에게 얻어맞아 피 멍이 들고, 그의 폭력으로 두 번이나 유산을 했으며, 몸 다섯 군데나 골절상을 입는다. 보증금과 통장을 다 털리고 그와 헤어졌으나 그녀의 이름으로 보증을 서고 도망간다.
‘괜찮은 사람’ 편에서는 갑자기 정전이 되어, 화자가 넘어지고 남자가 팔을 휘둘렀을 때 여자의 등을 친다. 그러나 우연이며 실수라고 말한다. 찜질팩을 건네는 그의 액션마저도 폭력을 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가 대체로 폭력적이며 부정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
반면, 여성 캐릭터는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세속적이다. ‘니꼴라 유치원- 귀한 사람’ 편에는 주로 여자들이 등장한다. 화자는 어렸을 때 한글을 못 읽어서 왕따를 당하는데, 알고 보니 거짓말을 잘 하고 이중인격을 가진 양슬기의 음모 때문이었다.
그녀의 성인 버전이 속눈썹 없는 여자이다. 그녀는 유치원 원장을 쥐락펴락 한다. 유치원 등록 대기 번호 2번인 화자에게 제 맘대로 순번을 바꾸는 힘센 여자다.
시 외곽에 자리 잡은 전원주택은 어렸을 때 돌아가신 부모님이 살던 집이다. 집주인은 ‘가족 없이’ 사는 조건으로 하숙생을 들인다. 혼자 살기 외로워서 누군가를 들인다는 이유로 아주 저렴하게 방을 내놓는다. 이 집에 하숙하게 된 희진과 나는 처음에는 잘 지냈으나 집주인의 질투와 눈총을 받게 되고, 둘 중 하나는 나가라는 말을 듣는다.
주인은 세든 사람들이 친하면 질투를 했고, 두 사람을 다투도록 한다. 그녀의 방에서는 심한 악취가 풍기고 하얀 벌레들이 나온다. 결국 화자는 룸메이트인 희진을 죽이고 이 집에 남게 된다.
그러나 시체를 넣은 방에 사체는 사라지고 희진이 편지를 쓰는 것으로 이야기가 반전된다. 인물들이 뒤숭숭 꼬이며 이해불가하다. 하얀 벌레 처럼 이상하다. 이 집에서 이런 일은 한두 번 일어난 게 아니다. 상투적인 수법이다.
하얀 벌레들은 인간의 사체를 먹고 사는 것으로 추측된다. 단지 그 집에 남고 싶다는 이유로, 동거인을 그렇게 쉽게 죽여야 하는지 묻는다.
인물들의 노련한 사회성 이면에는 불신감, 표리부동, 영악성, 자기의 트라우마를 해소하려고 뭔가에 과몰입하는 등 하나같이 세속적이고 불완전한 인물들이다.
‘방’은 도시의 빈민촌, 두 여자가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방을 얻는다. 수연과 재인이 하는 일은 건물 잔해를 분류하는 일이다. 언젠가 카페를 운영하는 것이 꿈이다. 그러나 그만큼 돈을 모으기에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그래서 돈을 많이 받는 일을 찾아 나선다. 시체들을 구덩이에 묻는 작업이었다. 원폭 피해자 시신인 듯 코가 없거나 귀가 없는 장애 사체이다.
돈을 모으기 위해서 열악한 주거환경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그들은 석면이나 석회 등 인체에 해로운 건물 잔해와 더러운 수돗물로 병들어 간다. 몸이 붓고 통증이 생기고 심한 갈증에 시달리며 점점 쇠약해진다. 도시를 떠나게 되면 병원에 가야겠다고 하나,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그들은 불에 타 죽는 줄 모른 채, 불 가까이 다가가는 부나방이다. 일당을 더 많이 받아 빨리 돈을 모으고 꿈을 이루려 하지만 꿈 가까이 가기도 전에 그들은 죽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공간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이 계속된다. 누구는 죽어가며 아우성을 쳐도 투명한 벽 너머 다른 쪽에서는 흥청망청 댄스 파티가 열린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다.
‘괜찮은 사람’은 시작부터 호기심과 많은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성공적인 작품이다. 왜 이런 장치를 하나? 이거 불필요한 장치 아냐? 사건과 모종의 연관이 있나? 그러나 끝까지 애매모호하다. 그것이 작품을 끌어가는 힘이자 매력 포인트이다.
어떤 독자에겐 갑작스런 부속인물의 출현이나, 우연적인 설정 등이 현실감을 떨어뜨리고 구성에 허점으로 읽히기도 한다. 현관에 발을 딛는 순간 갑자기 정전이 된다든지, 그가 손을 뻗었는데 옆 사람의 등짝을 퍽 친다든지,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져 생긴 멍자국이 ‘살 속 깊숙이 도려낸 어둡고 깊은 구멍’ 같다는 표현들이 착착 감겨오지 않고 매끄럽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 ‘날씨가 평온했다’고 표현하는데 이건 기습적인 폭력이다.
이런 표현은 계속 이어진다. 그가 5년 전 사놓았다는 시골집을 보러 가는 중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에 불빛이 보인다’ 뜬금없이 전설의 고향 같은 설정이다. ‘찜질팩을 주려고 팔을 뻗자 그녀가 흠칫 놀란다’.
작가의 의도는 알 것 같으나, 불쑥 개입하는 생경한 문장들이 자연스레 스미지 않고 따로 논다. 인물의 대화 역시, 어색하고 격이 떨어진다. 화자는 수상한 일들을 감행하면서, ‘내키지 않는 일들을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하기 때문에 자기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역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게 우습다.
‘눈사람’은 추운 겨울에만 살다가 봄이 되면 녹아 사라지는 존재이다. 11살 꼬마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눈사람처럼 사라졌다. 엄마는 아빠의 폭력과 구타를 견디다 결국 아빠의 빚을 떠안고 이혼을 한다. 엄마는 두 형제를 키우다가 사라진다.
그때 나는 11살, 형은 17살이었다. 형은 어디서나 얻어맞기 일쑤였고, 13살 무렵엔 보험금 때문에 자동차 바퀴에 깔렸다는 소문도 있다. 그런 환경에서도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동생에게 공부를 하라고 충고한다. 방벽에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세계 여행을 꿈꾸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편의점 사장이 형의 명의로 돈을 빌리고 자취를 감춘 후 형은 엄청난 빚을 떠안게 된다. 나는 고물 쓰레기를 주워서 팔기 시작했고 형을 돕고 싶어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은 내게 무얼 먹고 싶냐고 묻는다. 나는 콜라라고 말한다.
형이 떠나고 나는 의식을 잃고 죽어가게 된다. 그때 환각처럼 누군가가 나타나고 곁에 쌓인 물건들이 쏟아진다. 콜라 캔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비쩍 마른 눈사람이 나를 들여다본다.
굴 말리크는 인도로 돌아간 후 일 년도 안 되어 사고와 화재로 죽는다. 그리고 지인으로부터 소포를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는다. 그녀는 굴 말리크의 한국어 교사였다. 소포를 찾으러 우편물 보관소를 찾아가는 길이 너무 멀고도 아득했다.
현실에서 출발하여 차원이 다른 가상의 공간으로 들어간 듯하다. 음울하고 어두운 배경이 독자를 가상의 공간으로 빨려들게 한다. 꿈속인 듯 상상인 듯 펼쳐지는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마주치는 인물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지나고 길모퉁이를 돌아서 계단과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헤맨다. 우리네 인생길처럼 지난하고 먼 길이다. 그들이 가야하는 곳, 계단 끝에는 버려진 상자처럼 놓인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 속에는 거울로 된 벽이 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거울 속에 나타난 유령 같은, 낯선 자신의 모습을 본다.
우리는 자기의 모습을 보기보다는 타인의 모습을 보면서 산다.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제 속의 대들보를 못 보듯이. 어느 날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을 때, 낯설고 기괴한 자신의 모습에 흠칫 놀랄 수도 있다.
작가는 독자들을 지치도록 먼 길을 돌고 돌아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이유를 묻지 말자. 모든 이야기의 결말은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