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이영의 옮김, 민음사, 2009)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2008)은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사상가, 소련 체제의 부조리와 전체주의의 폭력을 고발한 인물이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를 발표하여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고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다.
이 소설은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이하 슈호프)가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노동수용소에서 생활했던 어느 하루 동안의 일이다. 아침 다섯 시 기상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슈호프의 하루 일정을 사실적으로 서술한다. 세련된 문체와 명료한 문장으로 수용소 생활을 구체적으로 펼쳐 보인다.
시대적 배경은 1940년경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겨울이다. 밀림의 법칙만이 통하는 수용소, 건물 안이라지만 몸을 녹일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유리창은 ‘꽁꽁 얼어’있고, 천장과 벽은 ‘하얀 거미줄 같은 성에’가 끼어 있을 뿐이다.
실제로 작가는 27살(1945년) 포병 대위로 복무하다가 스탈린 체제를 비판한 글이 문제가 되어 강제노동수용소 8년, 추방 3년형을 언도받는다. 모스크바 근교의 루반카 수용소에 수년간 수감도었으며, 남은 형기는 북 카자흐스탄 탄광지대에서 강제노동수용소로 이송되는 경험을 한다. 그때 그의 나이 38살, 작중 인물 슈호프와 비슷한 연배다.
그 때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암병동’이라는 소설을 썼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빅터 프랭클의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내용이 오버랩 되었다. 정신과 의사인 프랭클 박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생존자이다. 그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정신력 하나로 버텨냈다.
프랭클 박사와 슈호프의 공통점은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을 생각하며 긍정적인 생각으로 고통에 맞섰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인간이란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살아야할 이유가 있는 한 극한 상황을 초극할 힘을 얻고 끝내 살아남는 다는 사실이다.
1941년 슈호프는 집을 나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그의 나이 마흔 살 언저리였다. 그는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10년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피하려고 거짓 서명한 것일 뿐이다. 이유라면 단지 독소 전투에서 독일군 포로로 잡혔다는 게 전부다. 그런 가당찮은 이유로 10년 형을 선고 받다니. 그 곳에는 슈호프 처럼 모호한 죄명으로 입소한 평범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재수 없으면 형기가 만료되는 시점에 다시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재수감될 수도 있는 무력한 인간들이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고 불의를 보고도 참아야하는 짐승의 시간이다.
솔제니친은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목도한 수용소 생활의 참담함을 폭로하면서 당시 정치권력이 무고한 민중들을 얼마나 잔인하고 포악하게 억압했는지 낱낱이 고발한다.
읽는 내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과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철학자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는 것이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이 세상에 던져져서 살고 있을 뿐이며, 몹쓸 시대에 이념의 논리에 저촉되어 수용소에 갇힌 것일 뿐이다.
“수용소 생활에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아침 식사 시간 십 분, 점심과 저녁 시간 오 분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것이다.”
슈호프의 삶에서 ‘유일한 삶의 목적’은 하루 세끼 최소한의 ‘음식’과 그것을 먹을 수 있는 ‘20분’의 시간이다. 인간에게 삶의 목적이 있는가 자문해본다.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살면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화두이기도 하다.
돈, 자유, 명예, 행복인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순간이다. 아무리 긴 수용소의 생활도 영원할 순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은 유한한 가치로서 충족되지 않는다. 따라서 삶의 목적이라기보다 생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수용소의 삶이란 게 꼭 동전 던지기 게임 같다. 그날그날 운세에 따라 결정되고 이런 날들의 고리가 이어져서 인생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삶은 절망적이다.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견딜 수 없이 무의미하고 비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슈호프는 최소한의 생존 환경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인물 유형이다. 때론 교활하고 약삭빠르게, 때론 어리숙하나 인간적으로 후덕한 모습을 보여주며. 이런 모습은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으로 타당성을 얻는다. 인간은 어떤 극한의 조건 속에서도 적응하는 자만이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폴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피투 된 존재로서 기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인간도 타인에 의해 개인의 자유를 빼앗기거나, 구속되어선 안 된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당시 강제노동수용소는 스탈린 체제하에서 양식 있는 지성인을 탄압하고 순치하려는 불의와 부패의 소굴이었다. 또한 ‘공포정치 시대의 상징’이며 ‘정치적 억압의 수단’으로서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만 하고 전 세계인의 지탄의 대상이 된다.
말과 사상, 글쓰기는 무력보다 강하다고 한다.(펜은 칼보다 강하다.) 모름지기 작가의 소명은 왜곡된 사회현상에 대해서 지적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외부의 간섭 없이 고발하고 알려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생각하는 동물이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유일한 존재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용기이다.
따라서 하루 동안 슈호프를 따라 수용소 이모저모를 탐색하면서 독자는 한 생각에 골몰한다. 작가는 무엇에 대한 글을 써야만 하는지, 그리고 왜 써야만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은 후 작가의 분명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반소작가로 체포 ․ 구금되고 소련작가동맹에서 제명을 당했으며 온갖 박해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글을 써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란 누구도 타인으로부터 부당하게 어떠한 자유도 억압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한 시대의 지성인이며, 선각자로서 인간의 기본 인권에 대한 목소리를 내야한다. 지배세력으로 인해 고통과 억압을 당하는 무고한 약자들을 대변해서 글을 써야만 한다.
나아가 불합리한 이데올로기의 피해와 희생을 줄이고 보다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데 하나의 디딤돌이 되는 것이 작가의 소명이자 역할이다.
인간에게 가장 혹독한 고통은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가혹한 노동이다. 여기에 억울한 누명과 이유 없는 폭력, 짐승처럼 짓밟히는 모멸감이 더해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삶이 아니라 지옥 그 자체일 것이다. 그 하루는 끝이 보이지 않는 영원처럼 긴 시간으로 느껴질 것이다.
슈호프는 이러한 절망의 시간을 하루가 아닌 삼천육백오십삼 일을 버티고 살아 남아, 마침내 자유를 되찾는다.
《뉴욕 타임스》는 “솔제니친은 단순한 폭로문을 쓴 것이 아니다. 그는 선동적이기보다 절제된 언어로, 미숙한 번역으로도 훼손되지 않을 만큼 신중하고 간결한 문체를 구사하여 작지만 거의 완벽한 고전을 창조했다”고 평했다.
작가는 말한다.“권력의 남용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명확하고 철저히 규명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이다. 세월은 흐르고 우리 모두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밝혀야 할 진실을 끝까지 밝혀야 한다. 그래야만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편집자 츠바르도프스키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소개하며 언급한 제22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 연설문의 일부이다. 그는 이 연설의 정신을 작가 솔제니친에게 되새기며 진실을 향한 그의 용기와 양심에 깊은 경의를 표했다.
작가는 슈호프를 통해 자신이 직접 겪었던 비인간적인 현실을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인간의 의지와 존엄을 보여주며, 그 질곡의 세월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불굴의 인간 정신과 생명력에 대한 영원한 헌사로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