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유안, 창비, 2008)
「스프링 벅」은 아프리카에 사는 양의 이야기이다. ‘한번 뛰기 시작한 수천 마리의 양 떼는 성난 파도와 같이 산과 들을 넘어 계속 뛰어간다. 왜 뛰는지, 어디를 향해 가는 지도 모른 채 뛰어갈 뿐이다. 싱싱한 풀 같은 건 본 체 만 체, 아무런 생각 없이 뛰다가, 절벽을 만나면 지금까지의 속도에 가속력이 붙어 더 세게 몰리다가 모두 다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려 죽게 된다.’
생각해 보면 무서운 이야기다. 우리 사회, 우리 인생에 대한 비유와 상징을 담고 있다. 대부분의 모든 인간이 향해 가는 곳이 어디고, 무엇인가. 돈과 명예와 권력이다. 한결같이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모든 부모들은 자식들을 조기교육과 사교육 현장으로 자식들을 앞세운다.
우리 아이가 무엇을 해야 잘 할 수 있는지, 타고난 재능과 취향을 알아볼 새도 없이, 제 나라 말을 배우기도 전에 외국어교육을 시키고, 사물을 채 알아보기도 전에 글자를 가르친다.
1등만을 인정하고 우대하는 사회, 명문교 출신, 대기업 입사만이 성공이고 행복의 지름길인양, 너나없이 소중한 자식들을 입시에 떠밀어 넣고, 모든 사회가 과도한 스트레스로 부하가 걸린다. 피곤한 사회, 고통스런 인생이다. 인간의 참 소망과 존재의 이유도 모른 채, 과도한 경쟁에 떼밀려 가속도로 질주하다가, 절망에 빠진 채 죽음으로 내몰리는 양떼와 같다.
이 책은 처음 ‘제1막 제1장’을 시작으로 마지막 장, ‘형, 나의 형’이라는 장을 끝으로 총 15편으로 된 장편소설이다.
작가 배유안은 중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였고, 창비사에서 공모한 ‘좋은 어린이 책’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교육현장에서 체득한 현실적인 고민을 소설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우리 사회가 진정 무엇을 향해 가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모두가 똑같은 곳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을 보며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부모의 잘못된 욕망에 떠밀려 소중한 자식들이 희생당하는 스토리를 통해서 일말의 구원을 바라는 메시지가 전해진다.
이야기는 연극부가 공동으로 대본을쓰고, 그것으로 연극연습을 하는 것으로 스토리가 펼쳐진다. 수업시간 선생님이 들려준 양 떼 이야기와 현실 속의 문제를 접목한 것이 주제다. 팀마다 주제가 제법 의미심장하다. ‘오늘 죽고 내일 다시 태어나기’ 또는 ‘눈과 비가 오지 않는 세상’에서 ‘카르페 디엠’이라는 표제들이 눈에 띤다. 그나마 연극부는 학생들에게 쉼과 힐링이 되는 구실을 한다.
책장을 넘기다가 ‘오늘을 놓치지 말아야지’라거나, ‘누군가가 울면 누군가가 웃는 것이 세상의 진리’라는 대목에서 잠시 주춤거리며 생각을 하게 한다. 또 ‘초등학생에게 영어로 수학을 가르치면 영어실력이 늘까? 수학실력이 늘까?’라는 주제에서 내 생각은 둘 다 꽝일 것만 같았다.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학습효과를 저하시키는 역효과가 날 것만 같다. 아이들의 자연스런 반응이 생기기도 전에 막무가내로 몰아치기 때문에 배움에 대해 의욕이나, 재미를 잃고 수렁을 헤매게 되는 건 아닌지 우려되었다.
지학시간에 일어난 현우의 사건도 마음이 아팠다. 교과 이외의 말을 한다고 눈치 없이 나서서 교사의 말을 끊는 것이 옳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진도 좀 나갑시다.'라는 말 때문에 학생의 뺨을 때린다는 것은 교사의 잘못이다.
이 사건은 어른도 미숙하고 부족한 인간임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교사가 순간의 자기 감정 조절하지 못해서 평생 후회할 짓을 한 것을 두고, 교사도 일개 미숙하고 성급한 보통 사람이기에 용서해야 한다는 말은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디에서건, 말과 행동을 더 조심하고 조금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는 페이지였다.
창제가 보낸 ‘네 인생을 네가 주도해라’라는 이메일에서 인용한 유치환의 「생명의 서」 는 독자에게 또 다른 사색의 숲을 선물한다.
유치환의 「생명의 서・일장(一章)」 이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중략)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 와 대면케 될지니(하략)
내가 누구인지 나의 정체성이 혼미한 채 살아갈 바에는, 차라리 뜨거운 아라비아 사막 한가운데 서서 '백골을 내 쬐이고' 죽는 게 낫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창제의 가출은 청소년들의 방황을 또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법을 제시한다. 외부세계와 연결을 끊고, 사막과 같은 낯선 곳에서 '인생의 주체가 되어 자기의 삶'을 고민해보는 시간은 방황하는 청소년에게 좋은 약이라고 생각한다. ‘네 인생은 네가 주도해라. 자신이 맺은 것이라야 그 맛이 황홀하다.’는 화두로 다섯 주를 살다 온 창제가 정말 멋지다고 생각된다.
바른 길, 검증된 길이라고 확신에 차서 윽박지르는 것보다, 스스로 실패를 하며 터득한 길이야말로, 서툴고 느리고, 성과가 작을지 몰라도 훨씬 값진 것이라는 생각이다.
창제 역을 대신 하게 된 동준이가 배역에 충실하자 ‘대타가 히트친다’라는 말로 그를 추어준다. 어떤 것에도 마음을 주지 못했던 동준이에게 좋은 기회였다. 그만큼 동준이는 창제의 ‘미키 역할’에 최선을 다했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다.
일류대에 들어가고 공부를 잘해서 부모님의 희망이었던 범생이 형이 죽었다. 형이 들어간 대학교 2층 건물에서 떨어져 죽었다.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서울대 의대 장학생이라고 개인교습을 해준 장근이형이 형 대타로 수능을 치룬 것이었고, 형이 부모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게 된 것이었다. 성준이는 그 사실이 괴로워서 더 이상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다.
단순 사고가 아니라 자살한 것이다. 세상사는 법을 잘못 가르친 어머니의 과실이었다. 무엇이 엄마를 멈추지 못하게 한 것일까. 형이 풀 맛을 볼 겨를도 없이 무작정 끌려 다니다가 벼랑에 굴러 떨어진 ‘스프링 벅’이 된 것은.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동준이는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고, 형 문제를 괴로워하면서 삶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중에 창제 대신 연극을 하면서, 거기에 몰입하게 되었고 힘든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여자 친구 예슬이를 만나 고민을 털어 놓은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예슬이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어른들을 불신하게 되고 내내 외로움 속에서 지내며 어머니와 세상에 대한 불신과 미움이 생겼다. 그런데 어머니를 다시 만나고 나서 부모님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사이프러스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엄청 크게 자라기 때문에, 심을 때부터 서로 간격을 벌린 채 뚝 떼어서 심는다. 훗날 나무가 완전히 자랐을 때, 그 그림자가 옆의 나무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부부나 친구도 이혼이나, 헤어지는 이유는 서로 곁에 있음으로 피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경우에 따라서는 옆에 붙잡아 놓고, 제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이프러스 나무의 성장을 방해한다는하는 이야기다.
서로 상처를 가진 친구들이 서로에게 위로와 힘을 주며 어둠을 밀어내는 모습이 대견하고 기특했다. 그들은 어둠이 깊은 만큼 그들이 맞이할 태양은 더욱 빛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예슬이는 시와 편지로 동준이에게 힘이 되어주고, 동준이는 그런 시를 읽으며, 받은 힘으로 다시 예슬이에게 희망이 되고 위로가 된다. 서로의 아픔을 다독이면서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간다. 한결 성숙해진 생각으로, 잘못된 어른에 대해서도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어른들이 자신들도 약하고 잘못도 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문을 열어야 하는데 그걸 못한다는 저들의 생각이 공감이 간다. 어른들이 오히려 자기의 미숙함을 인정하기는커녕 더 윽박지르고 화를 낸다고 아이들은 생각한다. 순수한 아이들이 어른들을 이해하는 말이다. 때론 아이들이 어른보다 생각이 깊고 정직하다. 어른들도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마지막 장‘ 형, 나의 형’편에서 화자는 말한다. 지금은 우리 모두 너무 너무 아파서 이 상처를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덮어둘 수밖에 없다고. 사는 동안 내낸 상처는 어딘가에 파묻혀 있다가 틈만 나면 올라와 가족들을 울게 할 것이라고.
“나도, 엄마도, 아빠도 신열을 내며 쓰리도록 울게 할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엄마의 이 지독한 통증도 조금은 가라앉겠지……그리고 아프지 않고도 형을 생각할 수 있을까? 아, 형, 나의 형!”
이렇게 끝을 맺는다. 너무나 슬프다. 우리에겐 이렇게 아픈 기억들을 가지고 아무렇지 않은 척 삶을 살아가고 있다. 신이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다.
눈을 감으면 한 무리의 양 떼가 광막한 초원을 질주하는 모습, 풀숲에서 울리는 거친 발굽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것들은 깊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사라지는 환영이 보인다. 저들을 막을 방법이 있을까.
조금씩 속도를 낮추고 ‘지금, 여기’의 의미를 생각하며 산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