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크 포르티에, 임명주옮김, 김영사, 2023)
『종이로 만든 마을』은 도미니크 포르티에가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흠모하여 쓴 책이다.
소설과 산문시, 에세이의 경계를 허물며 자유롭게 쓴 글들이 디킨슨의 시처럼 친근하게 읽힌다.
(에밀리 디킨슨은 미국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생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사후에 미국의 섹스피어라 불릴 정도로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매사추세츠주 애머스트에서 정원을 가꾸며, 자연 속에서 17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
『종이로 만든 마을』에는 ‘에밀리 디킨슨이 사는 비밀의 집’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마을은 실제 마을이라기보다 저자가 상상하여 쓴 허구적인 공간이다.
200년 전에 에밀리 디킨슨이 살았던 마을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동화 속의 마을로 구현하였다.
자연 속에서 은둔의 삶을 살다간 디킨슨의 삶과 애머슨 마을이
작가의 상상 속에서 서정적인 문체로 그려진다.
에밀리 디킨슨은 자연 속의 온갖 새와 나무, 꽃과 들판을 관찰하고 교감하며 독신으로 살았다.
어린 시절의 그녀는 밝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이 살았다.
“나는 늘 진흙을 묻히고 다녔어.” 그녀는 기억했다. “나는 어렸을 때 두 가지를 잃어 버렸어. 하나는 진흙 속에 빠진 신발. 진홍 로벨리아를 찾아 헤매다 맨발로 집에 돌아왔어. 그리고 어머니의 꾸지람. 얼굴을 찌푸리시면서도 미소를 짓고 계셨던 걸 보면 본인이 힘들어서라기보다 나를 위해 혼내신 거지.” 디킨슨 초원과 그 인근을 흐르는 시내가 하나 있었다. 헤매기 딱 좋았다. 새빨간 로벨리아가 촉촉한 흙 위에 만발했다.-<에밀리 디킨슨, 시인의 정원>에서
빨갛게 핀 로벨리아에 꽂혀서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잊고, 엄마의 꾸지람도 잊은 채 진흙 속을 쏘다니며 이꽃에서 저꽃으로 감탄을 연발하며 돌아다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풍부한 상상력과 놀라운 감수성을 가진 아이는 새, 나무, 바위, 꽃, 별과 친구가 되어 대화를 나누고 시를 쓰며 살았다.
매일 자연속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일기로 쓰고, 친구들과 편지로 주고 받았다. 편지 속에는 잘 말린 꽃잎들이 들어있곤 하였다.
디킨슨은 자연의 순환 속에서 인간의 운명과 시간의 유한성을 인지하며 순응하는 법을 알았다 따라서 그의 시는 삶과 죽음, 고독과 희망,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내용이 깊이 농축되어 있다.
생전에 발표하지 않았던 수많은 시와 편지들은, 사후 여동생을 통하여 세상에 알려진다.
자연 속의 모든 물상이 하나의 소중한 작품이다
“클로버와 귀리가 무성한 들판, 하얀 나무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뾰족 지붕과 파란색 덧문, 그리고 겨울이면 박새들이 가느다란 발로 새하얀 시를 쓰는 마을,
드넓은 초원은 클로버와 벌 그리고 몽상으로 충분한 마을이다. ”
티티새가 날아와 빵을 쪼아 먹으면, 그녀는 새를 바라보며 새의 긴 이야기를 듣는다. 새를 통해서
지렁이, 변덕스런 암새, 사라져버린 푸르스름한 알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된다.
디킨슨은 자신은 착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잡초처럼 거세고 고약한 모습의 들풀처럼 살겠다는 것이다. 'ㅅ'자로 날아가는 기러기떼도 착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정원에 피어있는 꽃들을 보며, 인간의 삶을 빗대어 표현한다.
“꽃들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한 바이올렛은 꽃잎이 쭈글거린다고 속상해 한다.
또 어떤 바이올렛은 해바라기 그늘을 탓한다.
또 다른 꽃잎은 제 옆의 꽃잎을 부러워하며 작약은 개미 때문에 걱정이다.
백합은 차가운 발밑이 싫다고 한다.
장미는 제 향기에 취해 어지럼증을 말하며 강한 햇살을 고통스러워한다.
단지 민들레만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고.
그녀는 민들레처럼 자신의 환경을 받아들이며 감사하며 사는 길만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녀는 온갖 꽃을 말려서 식물 표본 집을 만든다.
박하 잎, 장미, 캐모마일은 겨울동안 차를 우려 마시기도 한다.
새들에게 훔친 씨앗을 모아 커다란 정원을 꾸민다.
자연 속에서 많은 것들과 교감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시를 쓴다.
그녀의 일상이 한 편의 그림이며 시이다.
이사 가던 날의 슬픔
이사는 정든 것들과의 작별이다. 이사를 감으로써 그동안 사귀었던 친구와 추억을 몽땅 잃게 된다.
화자는 열 살 무렵 에머스트를 떠나 이사를 가게 된다. 집을 팔 때 그녀는 모욕감, 수치심, 치욕을 느끼며 깊이 상심한다. 그러다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그 집을 다시 사서 돌아온다.
필자에게도 이사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 열세 살 무렵 이었다.
넓은 들녘 마을에서 먼 산골마을로 이사를 갔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슬픔이다. 이사는 그동안 정들었던 모든 것과의 이별이다. 친구와 학교, 골목길, 마을 입구의 정자 나무 등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아픈 추억이다.
어른들은 이사할 때 아이들의 의견 따위는 묻지 않는다. 다만 형편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강행하는 폭력이다. 아이들의 모든 삶을 송두리째 짓뭉개는 행위이다. 그게 얼마나 큰 슬픔이고 상처인지를 안다면 아마 어른들도 그렇게 갑자기 떠나지는 않았으리라. 미리 알려서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에밀리 디킨슨은 그 마을로 다시 돌아가서 살게 된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그녀는 다시는 이 집과 어린 시절 모두를 잃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집이었다.
집에는 젖소 도로시와, 외출할 때 마차를 끄는 적갈색 듀크(말)가 있다.
또한 이틀거리 알을 낳는 그웬, 렌, 에드위그라는 암탉 세 마리가 있다.
그리고 이름이 없는 돼지 한 마리를 키운다.
돼지는 소시지, 구이, 갈비를 만들어 그 해 겨울까지 먹었다고 전한다.
화자는 부모님으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로 만화경을 받는다.
만화경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비춰보며 많은 상상력과 창의성을 키운다.
또한 수많은 책을 통하여 세상과 자연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새와 조개류 태양계에 관한 책과 세익스피어 전집, 성경과 많은 것들이 있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계가 빈 노트 속에서 태동을 기다리며 그녀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독자들도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잊고 살았던 유년 시절의 추억이 너무 그립기 때문이다.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보랏빛 털 스웨터와 빨간 운동화였다. 어머니는 가벼운 주머니를 몽땅 털어 작은 딸의 선물을 사 오셨다. “너도 올해가 지나면 이런 것들을 다시 신기 어려울 거야.”라며. 유난히 예쁜 옷을 좋아하는 어린 딸에게 맘먹고 사 오신 선물이었다. 그걸 알기에 기쁨 속에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여 있었다.
이 마음을 오래토록 잊지 말아야지, 그리고 꼭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에밀리 디킨슨도 아름답지만 그를 흠모하여 글을 써내려간 작가 또한 못지않게 아름답다.
디킨슨의 시를 읽으며, 그녀가 살았던 마을을 상상하여 한편의 작품으로 그려내다니
작가의 시적 상상력이 몹시 아름답고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자기가 상상한 마을에서 흠모하는 시인을 만나,
함께 걷고 대화를 나누며 시를 읊조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교류하며 하나가 되는
두 시인의 모습이 아련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시와, 문학의 계절 가을이다. 서늘한 바람, 쓸쓸한 나무, 하늘도 구름도 한 편의 시다.
내 뒤를 따라오는 낙엽에 귀를 기울이면 뭐라고 시를 읊어줄 것만 같다.
그리고 바스락거리며 작은 소리로 속삭여준다.
'그냥 살아 있음이 소중한 한 편의 예술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