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IT 특성화고등학교에 입학
2020년, 군입대
2021년 말, 전역과 함께 취직, 그리고 자퇴
2022년, 첫 회사를 그만두다
나름 적당한 시기에 군입대를 하고, 전역을 한 뒤에는 바로 취직을 했다. 때는 2021년 12월이었고, 동시에 대학교도 자퇴했다. 그리고 취직하고 얼마 뒤, 퇴사를 결심했다. 2022년, 23살의 나이였다.
나름 빠른 템포로 입사와 퇴사를 결정하고,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꿈꾸게 된 데에는 과거부터 쌓아온 내 생각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퇴사까지 한번 끄적여보려고 한다. 꽤나 긴 글이 될 거 같다.
초등학생의 나
나에게는 3살 위의 형이 한 명 있다.
초등학생의 나에게 형은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시느라 집에 안 계실 때는 형의 기분에 따라 얻어맞고는 했다.
형이 몰컴(몰래 컴퓨터)을 할 때는 부모님의 차가 들어오는지 베란다에서 망을 봐야 했고, 내가 부모님의 차가 들어오는 것을 못 보면 이후에 또 맞곤 했다.
사람들은 흔히 동생이 까불어서 형한테 맞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형한테 많이 맞았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질 때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날 때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많이 신나 있었던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잘 까부는 녀석이라고 생각했을 거 같다.
그리고 형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과묵하고 조용한 모습을 많이 보였기 때문에, 내가 까불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무의식적으로는 까불었을지도 모르겠다.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확실한 건, 그때 내 감정은 형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어린애들이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속도는 어른보다 빠른 경우가 많았던 거 같다.
나도, 내 친구도 그랬고, 우리 형도 그랬다.
그래서 도어록 비밀번호가 빠르게 눌리면, 괜히 무서워졌던 기억이 난다.
중학생이 되면서
중학교 1학년쯤이었나,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빠 친구분들의 가족과 우리 가족은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그리고 자녀들끼리 간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 형에게 노래를 부르도록 유도하면서 까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화가 난 형은, 남들 앞에서 날 때렸고, 결국 여태 맞아온 사실이 부모님 귀에 들어가게 됐다.
사실 여태 맞으면서 부모님께 말하지 않은 데에는 보복이 두려워서가 가장 컸다. 아니 그 이유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모님 귀에 들어가자마자, 폭력은 사라졌다.
몰랐다. 그렇게 간단한 일인지.
도대체 어떤 걸 두려워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어린 내 세상의 가장 큰 두려움이 사라졌다.
심지어 굉장히 허무하게.
이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정말 두려운 일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내가 어울리던 중학교 친구들은 두부류로 나뉜다.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학원을 다니며 학업에 대한 걱정을 안고 사는 친구들.
아무 생각 없이 놀고, 가끔 미쳤나 생각이 들 정도로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친구들.
언제나 후자가 더 재밌었다. 나도 생각을 비울 수 있었으니까.
또, 공부를 열심히 하던 친구들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놀 때도 편하게 못 놀고 있는 거 같았다.
나는 편한 척했지만, 편하게 놀고 있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들이 불안해하던 것을 피하고 싶었다.
그들이 불안해하면서 가고 싶었던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이 왜 필요한지 생각하게 됐다.
처음엔 그 이유가 돈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대학과 직장이 어떻게 많은 돈을 보장해주는지 이해가 안 됐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아마도 명성을 원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잘 모르겠다.
나는 명성도 원치 않았다.
내가 행복한 게 더 좋을 거 같았다.
누군가 가르쳐주길 원했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마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가르쳐줄 시간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혹여 돈을 많이 벌어도 재미가 없다면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닐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돈은 많이 벌고 싶었다.
여느 맞벌이 가정처럼, 부모님이 돈을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택했다.
나름 이걸로 돈을 벌면 재밌을 거 같고, 멋있을 거 같은 길을.
그렇게 IT 특성화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고등학교
고등학교 생활은 굉장히 재밌었다.
기숙사 생활이 필수였기 때문에, 친구들과 항상 같이 있었다.
나를 통제하는 부모님도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만 외출을 허락하는 학교의 교칙을 어기고 종종 무단외출을 하는 것도 추억이었다.
언제나 평범한 교육에서 의미를 찾기 힘들어했던 나는, 무단외출을 통해 재밌는 활동을 찾기도 했다.
남들이 무단 외출해서 노래방, PC방, 편의점에서 놀고 올 때, 나는 언어교환 모임을 찾아냈다.
물론 노는 무단외출도 많이 나갔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언어교환 모임을 나갔다.
무단외출로.
야자시간에.
이런 활동을 하게 된 이유에는 책이 있었다.
바로 "9등급 꼴찌 1년 만에 통역사 된 비법"이라는 책이었다.
초중고에서 영어를 총 12년 동안 배우면서 외국인과 대화 하나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천지에 널려있었다.
책에서는 이 사실에 근거하여 현재 교육이 잘못됐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공감이 됐다.
무엇보다 저자의 스토리가 곧, 증거였다.
덕분에 밋업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을 찾을 수 있었다.
밋업에서 언어교환 모임을 찾을 수 있었다.
교육에 대해 어느 정도 의구심을 품었던 시기가 이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우리 학교는 특성화고등학교의 특성화고 전형을 이용해서, 좋은 대학을 보내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IT 교과와 함께 국영수와 같은 수능 과목들도 많이 가르치는 학교였다.
그러나 나는 국영수보다는 IT분야가 더 재밌어 보였다.
그래서 IT와 관련돼서는 따로 친구와 선배의 도움으로 웹 개발을 공부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배우고 나니, 혼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 모든 정보들이 나와있었다.
생각했다.
대학은 배우는 곳.
직장은 일하는 곳.
대학은 결국 일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곳.
하지만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대학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보가 대량으로 풀린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이다.
인터넷으로 공부한 내용들로 일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대학에 뜻이 없었다.
교육의 방향성도 의심됐다.
이대로 교육받으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는 걸까.
그래도 대학 졸업장은 있어야지.
요즘은 아직 대학 졸업장을 봐.
의미를 찾을 수도, 대학 졸업장이 내 실력을 보장해주는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을 꿈꿀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었다.
그러나 역시 부모님의 의견은 달랐다. 한 학년이라도 좋으니, 일단 대학교에 들어가서 정 아니다 싶으면 나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대학교
대학교 수업은 졸리기만 했다.
교수님의 목소리는 수면제보다 효과가 좋았고, 대학 동기들과는 생산적인 일보다는 술판을 벌이고 노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 등록금은 내가 동기들과 유흥을 즐길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데에 사용됐다.
우리 학교만 그랬을까 싶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고생한 사람들이, 대학교에서 놀지 않을 리 없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
난 그럴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나태하고, 게으르며,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누가 놀자고 하면 칼같이 거절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한번 의지를 다져도, 쉽게 꺼지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은 더 이상 안된다고 생각했다.
돈을 주고 놀고 있었다.
내 성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 미래를 위한 활동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즐겁긴 했다.
유흥이 그런 거 아니겠나.
군대
2020년 4월, 21살의 나이로 군대에 들어갔다. 훈련소에서 할 게 없었기에, 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었다.
이미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고, 자극이 됐다.
그러나 큰 감흥은 없었다.
그들이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특별하고 잘난 사람들의 이야기.
나는 아직 이런 생각을 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군대에서 할 수 있는 개발 공부를 했다.
평소에 관심을 가지던 인터랙티브 웹.
예쁘고 자꾸 찾게 되는 그런 웹사이트.
거기에 매력을 느끼고 공부했었다.
군대라는 곳에서,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운동도 꾸준히 하기 시작했다.
운동과 공부.
사회에선 잘 안 하던 일이다.
아이러니했다.
밖에서 그 많은 자유가 주어졌을 때는 나를 위한 시간은 갖지 않았다.
넘쳐나는 시간에 안주하며 다양한 매체들로 시간 낭비하기 바빴다.
정작 군대에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야 무언가 행동하기 시작했다.
나란 사람은 항상 그랬다.
억압을 받고, 통제를 당했을 때, 더욱 자유를 갈망하고,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어떻게든 찾으려 했다.
그걸 인지한 지금, 억압이 없어도 나를 통제하는 능력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느끼고 있다.
전역, 그 이후
군대에서 나도 모르게 가진 개발의 시간들은 내 이력서가 됐다.
서류상으로 전역을 한 뒤, 바로 이력서를 여기저기 넣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달, 취직에 성공했다.
부모님이 굉장히 좋아하셨다.
티는 안 내셨지만, 맨날 방구석에 처박혀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굼벵이, 대학에 관심도 없고, 대체 방에서 뭘 하는지도 모르겠는 아이가 많이 걱정되셨던 거 같다.
아예 틀린 말도 아니다.
부모님이 늦은 밤까지 컴퓨터로 뭘 했냐고 물어보면, 개발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게임으로 보냈다.
기껏해야 개발은 아주 조금의 외주 정도였다.
취직을 하고, 월급을 받는다.
돈이 생기니 사용하게 된다.
돈이 들어오니 안심하게 된다.
난 편안할 때 시간 낭비를 했다.
하지만 취직 후, 나는 시간을 낭비하기가 싫었다.
열심히 살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회사, 그 자체에 억압을 느끼고 있었다.
자유롭지 못했다.
사무실이라는 공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정규 근무시간과, 출퇴근에 필요한 시간으로부터.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냥 노예라는 뜻인 거 같다.
거기다가 성장도 덜했다.
회사 특성상 일이 들어오지 않은 기간이 많았다.
나는 IT 관련 공부 중에서도 오직 내 직무와 관련된 공부를 해야 했다.
살짝씩 조금 더 넓은 범위의 직무 공부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상사가 싫어했기 때문이다.
성장이 없었다.
도파민이 없었다.
탈출구를 찾고 싶었다.
역시 책을 찾게 됐다.
고등학교 때, 평범한 교육이 아닌 언어교환 모임을 찾았던 것처럼.
책이 말한다.
너의 사업을 하라고.
성공한 사람들이 말한다.
너의 20대는 돈을 좇을 시기가 아니라, 경험을 쫓을 시기라고.
내 삶이 말한다.
나는 고등학교부터 주변엔 IT와 관련된 일 밖에 없다고.
경험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결심이 필요했다.
중학교 때, 형의 폭력이 굉장히 단순하게 해결되고 들었던 생각처럼, 내가 뭘 두려워하는지 생각했다.
최악을 생각했다.
별거 없었다.
내가 생각한 최악은 아르바이트였다.
사지 멀쩡한 나는, 아르바이트는 구할 수 있었다.
전문기술도 있었다.
최악까지 안 가면 연봉이 낮은 회사에 취직하면 된다.
그게 다다.
새로운 시도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나타나는 최악이 고작 그거다.
그래서 결심했다.
퇴사를 하고, 나의 시간을 찾아보자고.
일단 시도해보자고.
내 20대를 도전과 실패의 시기로 삼자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에는 항상 내 과거가 묻어있다.
내 성장에 시간을 쏟고 싶었던 직장인의 내가 있었기에 억압을 느낄 수 있었다.
남들이 가는 길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던 중학생의 내가 있었기에 다른 길을 염두에 둘 수 있었다.
학교 교육이 아닌 언어교환 모임을 찾아냈던 고등학생의 내가 있었기에 바로 책부터 찾을 수 있었다.
두려움에 대해 한번 더 생각했던 초등학생의 내가 있었기에 퇴사 후 최악을 생각할 수 있었다.
최악을 생각하고 겁을 먹지 않을 내가 있었기에 퇴사를 할 수 있었다.
결국 과거가 퇴사를 선택한 나를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퇴사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