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친구들과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
미야자키 어느 특산품 가게에서 사 온 유자빵 봉지를 뜯어보니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손편지 한 장이 빵과 함께 들어있다. 손바닥 크기의 종이 위편에는 유자나무에서 유자가 파랗게 영글어가는 사진이 프린트되어 있고 아래에는 유자빵을 설명하는 문구 대여섯 줄이 얌전한 글씨체로 적혀있다.
일본어 실력이 짧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쉬운 글귀였는데 카구라 유자마을의 특산품인 유자를 듬뿍 넣어 맛있는 빵을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빵은 파운드 케잌으로 두 조각이 개별 포장되어 있었고 크기는 작았지만 빵 사이사이 유자가 듬뿍 들어가서인지 그 맛은 기가 막혔다. 딸내미 몫으로 하나 남겨야지 했던 걸 깜빡하고 두 개를 앉은 자리에서 홀랑 다 먹어버렸다.
미야자키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유자나무를 정성스럽게 키우고, 그 유자열매를 넣어 빵을 굽고, 하나하나 포장하고, 마음을 담아 손편지를 썼을 어느 농부의 자부심 넘치는 손길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내게 미야자키는 작은 유자빵이 주는 감동 같은 것이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그런 여행이었다.
이번 미야자키 북투어는 책쓰기를 목표로 인연을 맺은 12명이 함께하게 되었다. 여럿이 함께 여행한다는 것은 불편함을 다소 감수해야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꾸물거리는 일행을 기다리고 서로의 기분을 살피고 일정에 따라 같이 움직여야 한다는 면에서 그렇다. 일상에 쫓기고 여행 준비에 지쳐있던 동기들의 모습이 보였기에 이번 여행은 출발 전부터 맘이 편치 않았다.
우리나라에선 이미 폭염이 시작되고 있는 시기인지라 일본 큐슈 남부의 더위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아 그 또한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불길한 예상은 기분 좋게 빗나갔고 곳곳에서 여행의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경관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미야자키의 6월은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눈부셨다. 장마가 한창인지라 여행 내내 뜨문뜨문 내리는 비를 맞아야했는데 어떨 땐 폭우였고 어떨 땐 보슬비로 내렸다. 서울에서 긴 가뭄을 겪다 간 탓일까 미야자키에서 맞이하는 빗소리와 물기를 머금은 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시골 길을 한참 달려서 도착한 목성 그림책 마을은 공기부터가 달랐다. 새소리, 물소리, 벌레소리가 귓가에 울렸고 촉촉한 바람과 숲의 향기에 오감이 열렸다. 한일 문화교류 차원에서 준비한 한국과 일본 요리가 고루 섞인 식탁에 스무 명이 둘러앉아 함께했던 저녁식사는 즐거웠다. 정성들인 식탁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데 누군가로부터 대접 받는다는 느낌에 마음이 벅차서 그런 것 같다.
우리 쪽에서 우여곡절 끝에 준비한 월남쌈과 김밥이 특히 맛있었다. 한국에서 사가지고 간 총각김치에도 자꾸만 손이 갔는데 해외여행 갈 때 김치랑 고추장 챙겨가는 사람들의 맘이 이해갔다.
일본 음식 중에서는 고슬고슬 지은 흰밥을 별 양념 없이 삼각형으로 뭉쳐놓은 오니기리가 특히 내 입에 맞았다.
원주에 오니기리랑 우동을 파는 가게를 하나 내면 어떨까 상상해보았다. 우동 육수는 한국식으로 짜지 않게 해야하고 면발은 쫄깃한 일본식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포인트다. 좋은 쌀로 지은 밥 속에는 매실장아찌를 넣어야겠다는 구체적인 구상까지 해보았다.
이참에 중단했던 일본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리라 결심하기에 이르렀고 일단 일본어 여행회화 앱을 하나 깔았다.
언어가 통한다는 게 타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이국의 친구들을 사귈 때 얼마나 유용한 일인가를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림책 도서관에서 저녁을 먹는 중에 맞은편에 앉은 일본 아주머니와 눈이 자주 마주쳤다. 흐뭇한 표정으로 내가 음식을 잘 먹고 있는지를 지켜보고 계셨다. 타국에서 온 손님을 귀하게 여기고 따뜻한 맘으로 식탁을 차렸을 그녀들의 손길이 고마웠다. 음식을 만드는 손이 얼마나 부지런히 움직여야 식탁이 차려지는지 요리를 해본 사람은 안다. 우리 측에서 만들기로한 몇 가지 요리를 위해 수많은 재료를 준비하느라 시간을 내어 장을 본 친구들이 얼마나 애썼을지 생각해봤다. 수고로움을 똑같이 나눴어야 했는데 다수의 무심함으로 부지런한 소수가 더욱 힘들었던게 보인다.
누군가의 수고와 정성이 식탁에 오르는 것이기에 식탁 앞에서는 무조건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요리를 별로 즐기지 않지만 앞으로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할 일이 생기면 정성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2박3일간 미야자키현의 가정문고와 숲 속 그림책 도서관, 사이토바루 고고 박물관, 절벽에 세워진 우도신사까지 두루 돌아보는 일정이었는데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서도 미야자키 곳곳의 풍경을 들여다 볼 기회를 얻게되어 좋았다. 쇼핑은 하지않겠다고 다짐하고 갔지만 돌아오는 날 들른 대형 쇼핑몰에 들어서자 결심은 무너지고 온갖 특이한 술과 간식거리에 손이 갔다. 복숭아술과 안주거리, 홍차와 녹차를 사고 의류매장에 들러서 비싸지 않은 옷 몇 벌을 골랐다. 일본 의류는 디자인이나 색상이 특별하지는 않지만 가격대비 원단이 좋고 바느질이 꼼꼼해서 만족스럽다.
다시 원주로 귀가하니 찜통 더위에 에어컨은 고장 나서 더운 바람만 내뿜고 있고 수리기사는 며칠 뒤에나 올 수 있다고 한다. 냉장고는 텅 비어 먹을 건 없고, 휴대폰으로는 도시가스 요금 독촉 메시지가 날아온다. 일상으로 돌아오니 차가운 현실과 골치 아픈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 새로운 세상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가슴에 품고 활력소로 삼기로 했다. 가까운 미래에 나 홀로 떠날 일본 배낭여행을 버킷리스트에 담는다. 멀지않은 곳에 흥미로운 타국이 있고 까만 머리의 낯설지 않은 친절한 이웃이 있다는 사실은 기분 좋은 일이다.
중부지방에 앞으로 며칠간 장맛비가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가 들린다. 비소식이 이처럼 반갑기는 처음이다.
달력을 보니 벌써 7월이 시작되었다. 어쨌거나 올 여름은 미야자키의 추억으로 가슴이 훈훈하다.
이번 여행에서는 무엇보다 미야자키에서 만난 아름다운 꿈을 꾸는 선한 사람들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