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에게 어떤 언어는 아주 어색하게 입 밖에 나오거나 선언에 불과한 그 무엇이다. 그럼에도 능숙하게 관용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야 하는 혼란과 고달픔이 그들에게는 있다. 그 간극과 고달픔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형식을 부여하고 싶은 욕망이 시를 쓰게 한다. 그러나 안태운은 고달픔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감정으로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대신 그는 편지 두 통을 놓고 골몰히 응시한다.
우리는 이미 썼지만 건네지 못한 편지 한 통씩은 가지고 있다. “훗날 수신인을 되살려내 그제야 편지를 건네려다가도 문득 망설이지. 편지의 내용과 달라져 있는 네 마음을 들어다보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변화했는지.”(「편지에 대해 편지 쓰는 사람을」) 그래서 시적 주체는 “편지에 대해 편지 쓰는 사람이 되어서” “편지 쓴 순간부터 서서히 변화해온 것들에 대해서” 다시 편지를 쓴다. 두 편지를 나란히 놓고 바라보다 순서를 거꾸로 해서 되풀이해서 읽어보기도 한다. 건네지 못한 원래의 편지와 그 편지에 대한 편지. 그 사이에서는 어떤 감정이 생겨날까. 안태운은 눈으로 볼 수 없을뿐더러 언어로 표현하기 애매한 그 사이 공간에서 ‘흘러가는 것’들에 주목한다. “그렇게 먼 과거와 미래가 어디선가 내게 흐르는 것”(「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었지?」)같은 느낌들을 마치 산책하면서 주변 풍경을 찬찬히 망막에 새기듯 섬세하게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눈을 감고 걷는 사람”이길 “눈을 감고 걸으며 눈앞으로 떠내려가기를”(「그 편지를」) 바란다.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시적 아이러니는 우연을 계속 속으로 중얼거리는 주체의 태도도 한몫을 한다. 그들은 반드시 도달해야 할 삶의 절정은 없다는 듯 “우연한 슬픔과 우연한 기쁨과 우연한 결속이, 세상에나 우연의 일치군요” “소리가 들리면 들리는 소리를 따라가고 침묵이 흐르면 흐르는 침묵을 좇아가면서 에두르고 스미면서 휘파람을 불면서”(「하루」) 나가면 어디로든 갈 수 있으리라는 마음으로 자주 집 밖을 걷는다. 안태운의 시적 주체들은 그들의 세계가 누군가에게 각인되기를 강요하지 않는 이른바, 자신을 ‘덜어내는 태도’로 천천히 독자들을 ‘눈을 감고 걷는 산책’에 응하게 만든다.
이러한 ‘덜어내는 태도’는 시에서 언급되는 세계 혹은 사물과의 관계 양상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풍등」에서는 도서관 안으로 들어온 새가 나갈 곳을 찾지 못한 채 퍼덕거리다 바닥에서 죽은 듯 있는 상황을 보고 “안쓰러워요”하는 감정을 느끼지만 그러한 인간의 감정이 자칫 새를 섣불리 인간화하는 건 아닌지 경계한다. 요컨대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는 전반적으로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 그리고 “인간의 형상을 본뜬 것들”과 “어떤 형상이든 인간처럼 만들어진 것들”(「풍등」)을 주목하고 그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관계 양상을 비틀어서 근본적으로 재인식하게 만든다. 이는 애초에 그가 ‘눈을 감고 걷는 사람’이길 원했던 아이러니와도 결을 같이 한다. 또한 자신을 덜어내는 시각 주체의 태도 변화는 곧 시각문화의 관행을 잠시나마 멈추게 한다. 주체와 그를 둘러싼 환경과의 관계 양상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서서 심리적 공간으로 전환되는데 여기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감각이 바로 ‘시각’이다. 근대 이후로 ‘시각’은 감각의 위계에서 항상 우위를 점령하고 있고 그것은 시 형상화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보고 있다’라는 개념에는 이미 ‘보이는 대상’을 객체화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에, 엄밀히 말해서 그 관계 양상은 공평하지 않다. 그런데 안태운의 시에서는 일반적인 시각 주체와 객체 사이의 ‘공평하지 않음’이 보이지 않는다. “나와 함께 공터를 산책”한 흰 개는 “나의 개이자 공터의 개”(「흰 개를 통하여」)이고 “나는 내내 도처의 풍경처럼만 다가가고……”(「동행을 따라다닌 풍경」) 인간의 풍경이 아니라 “풍경의 인간”(「구름과 생물」)이 된다. 더욱이 “외부에서 누군가 창문을 통해 바라”볼 때 “텅 빈 안에서라도” 누군가는 밖을 쳐다보는 것 같다고 인식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유는 사물과의 관계에서 시각 주체 중심의 고착된 양상을 탈피하는 새로움이자 “사물은 어려운 존재”(「어느 주말에 이르러 침대와 의자」)라는 ‘겸손한 태도’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이 시집에서 “너는 눈이 없었다. 너는 흐를 때 눈이 없었다.”(「창문을 열어놓을 때 곳에 따라 비」) “나는 내 눈을 피해 다녔어요”(「풍등」)처럼 유독 ‘눈의 부재’가 자주 서술되는 점도 이러한 연유이다.
이렇듯 물성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의 이면에는 물론 상실이라는 감정이 있다. 정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상실은 애도의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문학적’ 영역에서의 애도는 심리학의 그것과 분명, 일정하게 차이가 존재한다. 요컨대 심리학적 애도가 ‘상실을 향하는 감정’ 자체로 규정될 수 있다면, 문학적 영역에서의 애도는 그 ‘상실감’의 정서를 보유하면서도 문제적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형상화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상실에 대한 안태운 식 문학적 애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빈방의 빛”으로 드러난다. “전화를 하고 업무를 처리하고 차를 마시고 (중략) 옥상으로 올라갔다 내려오고 순식간에 하루 일과가 지나가는데” “어느 순간 내가 나를 흘러가버린 이야기처럼 대할 때 마음이 이상했지.”(「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었지?」) ‘내가 나를 흘러가버린 이야기처럼’ 대하는 상실감이 몰려올 때 그는 섣불리 그 상황을 벗어나려거나 회피하는 태도를 지양한다. 오히려 “나는 상황에 처하는 걸 좋아합니다. 상황이 나를 어떻게든 이끌어가도록. 그렇게 어떻게든 상황 속에서 나는 내가 변모해나가는 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직면하면서 갱신해나가길.”(「그 편지를」) 그저 그에게는 “생활을 하면 잃어버리는 빈방”을 기억해서 그러니까 나에게, 내가 없다면 옆에 있는 사람에게라도 그 방을 보여줄 수 있는 잠깐의 시간을 확보하면 된다. 그리고선 빈방에서 다시 멀어져 빨래를 널고 다시 빨래를 널어놓은 채 오래 걷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순간’들이 있다면 ‘생활(빨래)’과 빈방(예술)은 더 이상 충돌하지 않을 수 있다. 그가 말한 대로 “어느 순간 나는 빈방의 빛 속에서 말라가”(「빈방의 빛」)는 새로운 생활(빨래)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그의 시는 흘러가는 것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자유롭게 내뱉는 듯 느껴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석구석에 섬세한 내면의 리얼리티와 절제된 감정들이 스며들어 있다. 그의 시에서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이미지화된 뻔한 표정과 적당한 고뇌가 없다. 그러므로 그의 ‘빈방’에서 “개와 고양이는 물지 않아 핥지 않아 꼬리를 흔들지 않아 다만 무심하게 따라올 뿐”이다. 어쩌면 이것이 진짜 일상이자 기억일지도 모른다. 전형화된 포즈를 취하지 않고 흐르는 대로 놔두는 것, 이것이 상실에 대처하는 안태운 만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