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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우혜우 Dec 16. 2021

엄마가 되기 위한 혹독한 여정

-라이오넬 슈라이버,『케빈에 대하여』, 알에이치 코리아, 2012-

           


1. 인간 에바 VS 엄마 에바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에바가 남편 프랭클린에게 쓰는 편지 내용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 내용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그녀가 남편과 살았을 때 공유했던 사건이 등장하기도 하고 혹은 그녀가 미처 말할 수 없었던 내밀한 이야기를 고백하기도 한다. 소설 서두에서는 남편과 별거 중인 상황만 파악이 된다. 편지 곳곳에 남편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길래 갈등을 겪는 부부가 잠시 별거를 하고 있지만 곧 화해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잠시 가지며 읽어나갔다.

 밝혀지지 않은 ‘목요일’ 이후의 사건으로 에바는 불편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 첫 장면에서부터 에바는 지금도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게 두렵다고 말한다. ‘역사의식이 실종된’ 것으로 유명한 나라인 미국에서 에바는 미국인의 기억상실증을 이용해 돈을 벌고 있다는 반은 조롱인 말을 남편에겐 듣곤 했지만 실상 에바는 그렇게 운이 좋진 않았다. 그 ‘목요일 사건’ 이후 1년 8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이 ‘공동체’에서 그때를 잊었다는 신호를 보여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으니까.

 마트에 가서 메리 울포드를 만났을 때, 그녀는 당황한다. 그래서 깨진 달걀이 들어있는 상자를 집어도 그것을 바꾸러 가지 못한다. 그녀와 마주칠까 봐. 허겁지겁 물건을 사서 계산대로 온다. 물론 여기서도 그녀는 운이 좋지 못했다. 계산원이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그녀의 신용카드를 받고 ‘캇차두리안!’ 하고 불렀을 때 그녀는 그녀가 처한 현실을 깨달았고 그 현실이 너무 지겨웠다. 깨진 달걀을 바꾸지도 못하고 그대로 카트에 넣느라 손에 묻은 달걀의 끈적거림은 그녀의 수치심과 함께 그녀의 온몸에 들러붙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얼굴을 감추며 도망가지 않는다. ‘감정 때문에 무너질 순 없는 거잖아’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계산원에게 “그래, 난 뉴욕 주에 유일한 캇차두리안이야.” 맞받아치며 카드를 돌려받는다.

 이 짧은 첫 장면에서 나는 에바를 알아버렸다. 그녀는 자아가 강한 지적인 여자였다. ‘목요일 사건’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이 없진 않지만 그럼에도 그것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까지 버리지는 않는 여자. 어떤 상황에서도 옳고 그름을 구별할 줄 아는 여자. 그것이 에바였다. 결혼해서 케빈을 낳기 전까지 에바는 적어도 타인에게 보이는 면만으로 판단하자면, 행복한 여자였다. 그녀는 AWAP 라는 여행 가이드 회사를 운영하는 진취적이며 자유롭고 돈 많은 여성이었다. 거기에 잘 생긴 남편까지 둔 여자. 소이, 모든 걸 가진 여자였다. 작품을 읽는 내내 세상의 기준으로 모든 걸 다 가진 여자 에바가 ‘자의식이 조금만 부족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지적이고 똑똑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지나치게 예민했다.  

 에바의 지나친 자의식은 일상 곳곳에서 섬세한 내면의 균열점을 잡아낸다. 그녀는 친구 부부들과  어울리며 식사를 하고 난 뒤에 가끔씩 공허감을 느낀다. 완벽하게 유쾌한 사람들과 함께한 완벽한 점심에 뭔가 빠진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우린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그렇게 말해야만 하는 일상의 규칙과 예의를 지킬 줄 알았다.

 채덤에서 차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던 에바는 영국식 스펠링을 더 교양 있게 여기는 편협한 지역주의를 추정할 수 있도록 대형 천막에 ‘theatre’라고 쓴 영화관을 그냥 넘기지 못한다. 또한 내수용 테일러 매그넘 옆에 외지인을 대상으로 믿을 수 없이 비싼 격을 매긴 캘리포니아 적포도주 진판델을 구비한 주류 판매점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상황 역시 그녀의 비판적 레이더에 포착된다. 이렇듯 그녀는 일상의 경험과 행위, 그리고 눈에 보이는 환경들을 무심히 지나치지 못하는 비판적인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런 에바에게 엄마가 되는 길은 생각보다 멀고도 험난하다. 그녀는 공항에, 바다 풍경에, 박물관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레고로 가득 찬 똑같은 방에 갇혔다고 그녀는 불평한다. 그리고 소년원에서 만난 케빈에게 “엄마가 되는 건 거저 되는 건 줄 알았다”라고 고백한다. 물론 케빈은 비웃는다. 거저! “매일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거저 되는 게 아니야.”라는 조소와 함께. ‘목요일 사건’ 이후 불면에 시달리던 에바는 그 말에 “이젠 나도 그래”라고 대답한다. 그동안 소통하지 못했던 케빈의 일상과 에바의 일상은 비로소 접점을 찾는다.

 그녀는 사업 초반기에 말레이시아 여행을 하면서 그 나라의 열악함에 혐오를 느꼈다. 하지만 이는 점차 누그러졌고 단순한 짜증을 이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며 노력하고 이겨냈다.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그녀 자신의 도전에 능력을 발휘하도록, 다시 말해 스스로가 독립적이고 능숙하고 기동성이 있는 성인인 것을 거듭 증명하도록 스스로를 길들이면서 두려움을 점점 극복했다. 그러한 도전적인 삶 이후 그녀에게 말레이시아 여행보다 더 두려운 건 집에 머무는 시간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인간으로서는 훌륭하다고 칭송받아야 할 이러한 에바의 성품이 엄마로서는 오히려 결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케빈의 엄마인 그녀는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었다. 또한 그녀는 엄마가 된 이후 일에서 뒤처지는 걸 견딜 수 없어했다. 그녀는 엄마가 되는 게 두려웠던 게 아니라 보통 엄마가 되는 게 두려웠던 거라고 고백한다. 에바는 미래의 지도가 아직 그려지지 않은 다른 젊은 탐험가를 위해 출발점 역할이나 하는, 영원히 정지된 닻이 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리고 자의식이 강한 만큼 스스로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임신에 대한 공포는 더욱 컸다. 임신하기 전 아기 양육에 대한 그녀의 상상은 잠자리에서 미소 짓는 승무원처럼 동화를 읽어주고 아기의 늘어진 입에 질척거리는 것을 먹여주는 모습이었다. 여느 다른 사람들의 그림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한 피상적인 환상에 몰입할 수 있었더라면. 삶의 이면에 있는 진실이나 허위의식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주 잘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서두에서 말했듯이 그녀는 너무 똑똑하고 자신에게 솔직한 여자였다. 그녀가 두려웠던 건 폐쇄되고 돌처럼 차가운 그녀의 본성, 자신의 이기심, 관대함의 부족, 그녀 안에 머물면서 두터워진 억울함의 장력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페이지 넘기기’에 관심이 있다 해도,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케빈)에 가망 없이 옭아 매일 거란 예감은 그녀를 몹시 당황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녀가 일에서 항상 만족감을 느꼈던 건 아니다. 그녀는 새로운 나라들을 기록하는 사이 그것에 권태를 느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음식, 음료, 색깔, 나무-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들이 더는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권태는 불가피한 현실이라는 사실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빛이 흐려진다 해도 그것이 그녀가 사랑했던 본질이라는 건 여전한 사실이었고, 그건 지식이나 다른 사람들로는 채울 수 없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다른 등장인물에 비해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엄마라는 역할의  간극으로 인한 내면적 갈등이 가장 큰 인물이 에바였다. 그리고 이것은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비극의 출발점이 된다. 아! 오해하지 않기를. 그렇다고 케빈이 저지른 그 비극적인 사건의 원인이 에바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에바라는 사람에 대해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뿐이다.

 인간 에바와 엄마 에바의 대립은 문자 그대로의 대립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미국적이지 않은 것(에바는 에르메니아 출신이다)과 미국적인 것의 대립도 함축되어 있으며 소설 곳곳에 언급된다.      


2. 인간 프랭클린 = 아빠 프랭클린


 에바에 비해 프랭클린은 전형적인 미국인의 사고방식을 지닌 무난하고 평범한 사람이다. 그는 미국을 그 자체보다 훨씬 더 강력한 나라로 생각했다. 또한 미국인다운 포부를 지닌 덕분에 그는 양키 부모들이 텐도 한정판을 사기 위해 차우더 보온병을 들고 밤새 FAO 슈와츠 장난감 판매점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걸 묵인할 수 있는 현실감이 있었다. 특정한 것에는 저속하고 개념적인 것엔 웅장하고 초월적이고 영원을 이야기하는 모순을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상적인’ 범주의 사람이다.

 미국은 실존하는 최첨단 위에 서 있고 차별 없이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나라, 아무도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지 않는 나라, 정의를 갈망하는 나라, 거의 모든 오락거리와 스포츠가 제공되고, 종교와 인종, 직업, 정치에 차별이 없는 나라라고 굳건히 믿는 남자. 천혜의 풍경, 온갖 동식물과 기후를 가진 나라. 그는 이런 나라에서 아름다운 아내와 건강하게 성장하는 아들을 거느리면서 훌륭하고 풍족하고 호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없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그런 삶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현실에 주어진 표면적 환상성을 파헤치거나 비판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건 아마도 아르메니아 출신인 에바와 시작을 달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기득권을 가진 나라의 국민으로서 누리는 편안한 정서를 지녔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성 역할의 간극이 없기에 편안하게 일상을 영위하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아빠가 되는 것에도 거부감이 없다.

 그는 평범한 관점에서 좋은 아빠가 될 자질이 많았다. 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있어야 하며 셔츠를 접을 때도 엄격한 방식을 고수한다. 건강을 위해 식이요법을 지키는 성실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구원은 ‘의지’의 문제로 보는 지극히 이성적인 사고관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고집스럽게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에바 같은 사람들-을 폄하했다. 그건 살아있음의 단순함을 끌어안지 못한 채 나약한 성격을 드러내는 패배라고 생각했다.

 물론 프랭클린의 이러한 면들은 에반의 입장에선 지루하고 매력 없는 사고에 불과했다. 질서 정연함이란 시간과 함께 기꺼이 순종으로 전락하고 마는 성질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에바와는 근본적으로 소통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에바와 프랭클린은 서로 사랑했다. 프랭클린은 에바의 열정과 자유분방함을 이해하진 못해도 받아들였고 에바는 프랭클린의 미국적 보수성을 받아들이진 못해도 그의 그 무난함과 다정함을 좋아했다. 적어도 케빈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그것으로 인한 불편함을 비난하지 않고 감수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프랭클린이 희생했던 측면이 있었다. 그는 에바가 하는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아주었다. 그래서 관계에 문제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능력과 열정을 높이 샀다. 자기라면 에바처럼 마드리드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일찍 일어날 수도 없을 거고, 3주 뒤에 남편에게 공항으로 마중 나올 필요 없다고 무정하게 말하는 독립심과 용기도 없었을 거라 말한다. 그리고 솔직하게 그녀가 부럽다고 인정한다. 그건 예비 탱크 같은 거라고. 자신에게는 에바밖에 없는데 에바는 프랭클린 말고도 이곳에서 걸어 나가는 순간 다른 원천을 만나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둘 관계에서 더 사랑하는 이는 프랭클린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아마도 에바는 그녀의 자의식과 지성 때문에 약간의 지루함을 느끼기는 해도 대체로 행복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빠가 된 프랭클린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여자로서 사랑받고자 하는 에바의 욕구를 좌절시키고 그의 관심은 오로지 케빈에게 좋은 부모가 되는 것으로 축약된다. 임신한 에바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자 아이를 죽일 생각이냐며 정색을 한다.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행위는 인간이 공간과 혼연일체를 느끼며 온전한 자신이 되는 순간이다. 프랭클린은 에바가 더  이상 그녀 자신에 충실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기 엄마가 더 우선이라는 것이다. 육아를 힘들어하는 에바에게 “당신은 아기 보는 게 힘겹다는 걸 너무 대놓고 얘기하는 거 같아. 도대체 뭘 기대했는데? 공원에서 산책하는 거?” 라며 비아냥거린다. 더욱이 모유수유로 인해 열이 40에 이를 정도로 아픈 에바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에바는 애처로워 보이기 위해 그의 손에 있던 우유병을 내려놓고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리게 만드는 모욕적인 행동을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는 에바가 아프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육아로 인한 불평 꾀병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에바는 더욱 프랭클린 앞에서 좋은 엄마가 되기를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빠가 된 것은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는데 난 당신을 실망시키고 있었으니까. 난 당신 앞에서 모성적 광경을 연출하기를 거부했지. 일요일 아침 침대 위에서 버터를 바른 토스트와 함께 감미로운 모닝 롤을 먹는 모습을, 아들이 젖을 빨다가 환하게 빛나는 아내에게서 젖이 흘러넘쳐 베개를 적시는 바람에 당신은 카메라를 들고 침대 밖으로 나가야 하는 장면을 말이야. 당신은 내가 울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내 눈이 자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 에바는 울고 싶다는 의식이 있기 전에 먼저 눈물을 흘리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둘의 갈등은 케빈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때문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에바가 케빈에게 네 비명을 1분 더 듣느니 차라리 브루클린 다리에서 뛰어내리겠다는 말을 하는 걸 듣게 된 프랭클린은 에바에게 화를 낸다. 미국적 관념을 수용하는 그는 육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서 케빈의 실체를 보기보다는 아이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을 대입한다. 에바는 더욱 힘들어한다. 환상을 갖고 있는 사람과 싸우는 것보다 더 저주받은 싸움은 없기 때문이다.

 에바는 부모가 된다는 사실이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그냥 내버려 두는 사람이라면 그는 부모가 된다는 사실이 우리의 행동을 좌지우지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프랭클린의 아빠로서의 자기희생도 회피의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며 비난한다.

 에바에게 케빈은 미스터리였다. 반면 무심한 남자아이 같았던 프랭클린은 케빈을 태평하게 대했다. 그냥 조금 까다로운 남자아이일 뿐이라며. 어쩌면 그녀와 그 사이엔 인간 기질의 본성에 대해 아주 극명한 인식 차이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프랭클린은 아이를 불완전한 존재, 생명의 단순한 형태, 복잡한 성인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쯤으로 여겼지만 에바는, 그녀 가슴 위에 그 아이가 눕혀진 순간부터 케빈 캇차두리안을 엄청난 내면의 삶을 지닌 존재로 인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케빈은 태어난 순간부터 그녀를 외면했다.      


3. 엄마 에바  vs(?) =(?) 아들 케빈      

 

 에바는 임신 9개월 동안 태교에 임하거나 출산 후의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무임 승객을 들인 뒤의 초라한 대가를 먼저 떠올렸다. 케빈을 임신했던 기간 내내 그녀는 그녀가 운전자에서 차량으로 강등됐다는 생각, 혹은 집주인에서 집이 됐다는 생각과 싸워야 했다. 그녀는 조건부로 부모가 되기로 했고 그 조건들은 엄격했다.

 더욱이 에바의 진통이 있던 날, 라인스타인 박사는 진료실에 다른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힘을 주지 않는 에바가 역겹다고 말했다. 케빈이 태어나던 날 바로 그 순간, 에바는 케빈을 그녀의 한계와 결부시켰다. 그녀는 출산하던 날부터 엄마로서 직무유기를 했다. 직관적으로 케빈이 이를 알았을까? 케빈은 엄마 에바와 첫 대면에서부터 그녀의 갈색 젖꼭지에 입술이 닿는 순간 불쾌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몇 분 사이에 케빈은 울부짖다가 늘어졌다가 짜증에 몸을 비틀었고 끔찍하게도 에바는, 이 아이가 벌써부터 지루해한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 스스로가 본인은 자의식이 강한 사람인데 엄마가 되기 위해 과도한 노력을 해야만 했고 자신이 일반적인 프로그램을 따르지 않아서 우리의 갓 태어난 아기를 실망시킨 건 아닌지 죄책감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녀 스스로 노골적으로 말해 괴물이었다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그녀는 ‘개인적인’ 부분들을 세상에 보여주는 법을 배웠지만 출산의 순간에 그녀가 아무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세상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이젠 그녀에게도 금기가 생긴 것이다. 규범적 성향, 즉 아기를 출산할 때 뭔가를 심지어 좋은 것을 정말 느끼리라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은 기대를 포함하는 규범적 성향을 받아들이기 싫지만 새롭게 인정하게 된 것이다.

 아기들은 대단한 직관력을 가졌고 직관력은 아기가 가진 모든 것이다. 케빈은 그녀 품에서 숨길 수 없는 뻣뻣함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가 정답게 속살일 때 케빈은 그녀 목소리에서 숨어 있는 미묘한 분노를 느꼈고 그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케빈은 아빠의 웃음에는 꽤 자주 미소를 지어줬다. 하지만 엄마의 미소는 뭔가 어색하고 당혹스러운 것이고 아기 침대에서 등을 돌리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신기루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에바가 케빈을 사랑하기는 피아노 음계를 반복해서 연습해야 하는 일종의 훈련이었다. 그녀는 자의식이 강한 여자였기에 이러한 통찰에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다. 그녀에게 케빈은 단 한 번도 ‘아기’인 적이 없었고 그 애는 우리와 함께 지내기 위해 도착한 유난히 교활한 인간으로 우연히 아주 작았을 뿐이다.

 보통의 부모는 자기 자식이 옳은지 또는 그른지 개념으로 따지지 않는다. 하지만 솔직하고 까다로운 사람은 이에 대해 훨씬 더 엄격한 잣대로 들이대며 자식이 실망스러울수록 더욱 그 일에 몰두하게 되는 법이다. 자식과 하는 이론상의 광범위한 계약은 그녀에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이었고 목요일, 마침내 케빈이 그녀의 모성을 완벽한 수학적 한계로 묶어놓는 시험을 하던 날, 그녀는 그 약속에 기댈 수도 없었다.  

 에바는 남편을 닮은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부드럽게 빛나는 기쁨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녀는 케빈이 현저한 아르메니아인의 외모를 지닌 것에 내심 흐뭇했다. 남편의 원기 왕성한 앵글로 족의 낙천주의가 내 오토만족 유산의 느릿한 피를 활발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가 케빈에게서 본 것은 그녀가 직면하기 싫어하는 그녀의 숨기고 싶은 내면이었다. 그 아이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교활함과 침묵의 은밀함은 그녀로 하여금 축소된 그녀 자신의 가식을 대면하게 했다. 케빈은 그녈 보고 있고 그녀는 케빈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싫을 경우에 상대방이 자신의 싫은 면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에바의 예민한 지성의 부정적인 면을 케빈이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케빈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케빈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보냈으면서도 어린아이로 머무는 것에 집착했다. 하지만 케빈의 쪼그라진 옷 스타일은 정반대로 그 애를 더욱 어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케빈의 정신과 의사 한 명은 에바가 아들을 불안하게 만들어서 공격적인 성 취향을 지녔다며 그녀를 비난했다. 딱 붙는 소매단과 팽팽한 칼라, 그리고 홱 잡아당긴 허리 밴드는 그 아이의 몸을 구속했고 에바도 그걸 보면서 신체 결박을 떠올렸다.

 이런 퇴행은 다른 면에서도 드러났는데 케빈은 세 돌이 지나도록 말을 하지 않았으며 6살이 될 때까지 기저귀를 찼다. 사실, 케빈은 둘 다 할 수 있는데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케빈은 계속해서 살피고 또 살폈다. 엄마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실제로 에바 스스로가 밝혔듯 계산적인 모정을 보여줬기 때문에 케빈에게 뭐라 항변할 여지도 없다. 기저귀를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대변을 기저귀에 싼 케빈을 견딜 수 없어 이성을 잃은 에바는 케빈을 집어던져버린다. 마치 물건을 던지듯이. 그때의 충격으로 케빈은 팔뼈가 부러져 살을 뚫고 나오는 사고를 당한다. 그럼에도 케빈은 병원에 가서는 자기의 실수로 다쳤다고 거짓말을 하여 엄마를 변호한다. 그날 이후 케빈은 대소변을 가린다. 그러나 이것은 화해의 제스처이기보다는 에바가 자신에게 죄책감을 품게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자신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하는 하나를 포기한 것에 불과하다.

 케빈은 웨이트리스한테 ‘똥 싼 얼굴’이라고 놀렸고, 에바가 수많은 국가를 여행해서 얻어온 지도들로 꾸민 방을 훼손했다. 유치원 친구 비오레타가 스스로 몸의 성한 곳부터 피부 껍질을 긁어내도록 유혹했고 여동생 셀리아를 6미터 높이의 나무에 올려놓고 내려오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화학 약품으로 그녀의 한쪽 눈을 멀게 했다. 옆집의 트렌트 콜리의 자전거 앞바퀴의 급속 이탈 장치를 뒤집어 놓은 사람도 아마도 케빈이었다. 케빈은 집에서 엄마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고의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자위를 했다. 그는 컴퓨터 바이러스를 퍼트리기 위해 바이러스를 만들었는데 에바는 실수로 이를 회사에 퍼트려 막대한 손해를 입기도 했다. 육교 위에서 달려오는 차를 향해 벽돌을 던졌고 사라진 암스테르담 사진도 케빈의 소행이었다. 이 모든 케빈의 악행을 에바는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그 행위들을 케빈이 고의로 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목요일’의 그 사건으로 인해 케빈의 고등학교 학생들 몇몇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아주 잠깐이라도 그녀의 아들이 범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그저 케빈이 살아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어느 날 케빈과 에바는 같이 외출을 한 적이 있었다. 에바는 아들과 산책을 하고 외식도 하는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서 엄마 노릇을 하고 싶었다. 두 사람은 미국 문화와 미국인들에 대해 신랄하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이날의 대화에서 케빈은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음. 당신이 다른 멍청한 미국인들과 계속해서 서로 닮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뚱뚱해지지 않는 거야. 당신이 독선적이고 우월하게 행동할 수 있는 건, 단지 당신이 말랐기 때문이니까. 여기서 독선적이란 거들먹거리는 걸 말하는 거야. 어쩜 나한테는 커다란 암소 같은 엄마가 있었으며 더 나았을 뻔했어.” 에바는 계산을 했고 이후 다시는 모자 외출을 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이 대화에는 케빈의 내밀한 진심이 드러난다. 지적이고 날씬한 능력 있는 엄마보다는 암소 같은 뚱뚱하지만 독선적이지 않은 후덕한 엄마를 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에바와 프랭클린의 이혼 결정 대화를 들은 날 이후 케빈은 ‘목요일’ 살인사건을 저지른다. 데니 코비트는 연기 부문, 제프 리브스는 클래식 기타 부문, 로라 울포드는 ‘개인적 치장’ 부문, 브라이언 ‘마우스’ 퍼거슨은 컴퓨터 기술 부문, 지기 랜돌프는 발레뿐만 아니라 ‘차이에 대한 관용의 장려’ 부문, 미구엘 에스피노자는 학술적 성취와 ‘어휘 능력’ 부문, 소웨토 워싱턴은 스포츠 부문, 조슈아 루크론스키는 ‘영화 연구’ 부문 그리고 교사인 다나 로코는 의장의 역할이라며 체육관으로 초대해 총 9명을 양궁으로 살해한다. 살인하기로 결심한 다양한 계층·인종 및 각 분야는 다양한 미국 문화의 요소를 상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케빈은 그 상징들을 잔혹하게 죽임으로써 미국 사회와 문화를 조롱하고 있다.

 더욱이 이 소설의 반전과 충격은 마지막에 밝혀진다. 고등학교 살인사건을 전해 들은 에바가 경찰서에서 집에 돌아왔을 때, 딸 셀리아와 남편 프랭클린 역시 화살에 맞아 죽어 있었다. 에바가 프랭클린에게  편지들은 모두 그가 죽은 이후에 작성된 것이었다. 작품 서두에서 일시적 별거로만 파악되던 상황은 이제야 확실히 밝혀진다.      


4. 목요일이후 에바와 케빈     


 ‘목요일’ 이후 에바의 모든 일상은 그런 당혹스러움의 담요 속에서 질식해버렸다. 목요일 이후 끊임없이 제기되는 질문. 왜? 왜? 왜? 이 질문은 에바에게 불공평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왜 내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하지?’ ‘왜 내가 그런 혼란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지목돼야 하냐고?’ ‘그것이 의미하는 부당한 책임을 짊어지지 않은 채 사건의 충격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은 거야?’

 그리고 도심지가 아니면 꺼려했던 그녀가 케빈의 목요일 사건 이후, 교외 지역인 글래스톤에 남는 걸 택한다. 케빈의 곁에 머물러야 할 것 같다며. 그리고 덧붙인다. 아무리 익명성을 갈망한다 해도 이웃에게 날 잊히게 하고 싶진 않다고. 이곳은 그녀 인생의 파문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장소이고 요즘 그녀는 이제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해주기보다 그녀를 이해해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케빈에 대한 재판이 끝나고 남은 돈으로 다른 집을 살 수 있었음에도 임대아파트를 선택한다. 임대아파트에서

는 부서지기 쉽고 자신감이 떨어지는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했다. 언제고 이 모든 구조물이 기분 나쁜 생각처럼 눈 깜짝하는 사이에 사라질 것만 같은 그 느낌을 소망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옛날 집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때때로 집 창문에 페인트 린치를 당하곤 했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페인트를 지웠다.

 개인의 파멸이 인생의 사소한 일들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게 하리라 예상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사소한 공포에도 소름이 돋았고 우편함에 소포가 없어진 걸 발견할 때마다 절망했으며 스타벅스에서 거스름돈을 덜 받은 걸 깨달을 때면 짜증이 밀려들었다.

 언론에서 말하는 ‘범인’과 평범한 독자들 사이의 차이점도 명확히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평범한 독자 중 한 명이었던 그녀가 이제는 ‘범인’ 쪽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 구경꾼들은 ‘빌어먹을 똑같은 얘기가 지긋지긋해’ 지면 다른 채널로 돌릴 수 있는 사치를 누릴 수 있지만 범인은 그 사건에 영원히 갇혀있어야 점. 그녀는 ‘범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아량이 생겼다.

 소년원에 있는 케빈을 만나면서 에바는 왜 자기는 살려두었는지를 물었다. 케빈은 관객으로 지목된 이를 죽일 순 없지 않냐고 대답한다. 케빈은 엄마가 봐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비 인륜적인 살인이었지만 그 깊숙한 내면에는 엄마의 관심을 원했던 소박한 소망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에바는 감옥에서 면담 중 케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았다. 평소엔 항상 옆을 비스듬히 보던 케빈이었다. 에바는 멈칫했고, 불안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그녀는 예전에 단 한 번도 케빈이 날 똑바로 봐주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몇 년 동안 에바는 그녀의 엄마가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점을 비난했지만 목요일 이후로는 그녀가 엄마의 인생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엄마와 에바는 수십 년 동안 서로 거리를 두고 살았는데 그건 엄마가 광장 공포증 환자여서가 아니라 그녀가 쌀쌀맞고 무자비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스스로 친절해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제 그녀는 친절해졌고 모녀는 놀라울 정도로 잘 지내게 됐다.

 다시 케빈을 만난 어느 날 에바는 케빈에게 물었다. 왜 그랬냐고. 케빈은 침울하게 답한다. “난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젠 나도 모르겠어” 지적이고 예리한 에바는 케빈의 대답이 완벽한 단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스로 자신의 심중을 알지 못함’을 깨닫게 된 점은 놀라운 진전이라는 사실을 짚어낸다.

 에바는 회사와 부, 잘생긴 남편 그리고 딸을 잃었다. 에바는 지금 다른 누군가가 되는 확실한 지름길 앞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의 예술품’이라는 미국인의 사고방식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유럽식 관점으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역사 꾸러미, 환경의 창조물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자신만 알고 가꾸는 그 공격적이고 낙관적인 양키의 임무와 대결을 할 수 있게 해 준 존재가 바로 케빈임을 인정한다. 그녀가 미국 중산층으로서의 삶을 잃지 않았다면 깨달을 수 없었던 성찰들이다. 그리고 꽤 쓸 만한 아파트에 방 하나를 마련한다. 케빈이 생긴 후 18년에서 3일이 모자라는 날 그녀는 마침내 너무 지치고 너무 혼란스럽고 너무 외로운 나머지 계속 싸울 수 없다는 선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절망이든, 외로움이든, 게으름 때문이든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아들 케빈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일이 에바 캇차두리안에게는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르고서야 얻게 되는 길고 긴 여정이었다. 안타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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