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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우혜우 Dec 15. 2021

“찬란하지 않은” 것들이 보여주는 존재의 지평

이향아, <<별들은 강으로 갔다>>, 시학, 2019

 

 어느 가수가 노래했듯이 “내보일 것 하나 없는 나의 인생에도 용기는 필요한”법이다. 세상은 있지도 않은 ‘최악’과 ‘최선’의 상황들에만 ‘주의’를 두고 ‘주목’한다. 그 ‘주의’와 ‘주목’에서 배제된 것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그냥’ 존재한다고 쉽게 생각한다. 세상에 ‘그냥’ 존재하기 위해서도 수많은 과정의 고통스러움과 치열함을 꼭 쥐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이러한 무심함은 근본적으로 사유의 빈곤함과 관련이 있다.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우리는 과정보다는 결론만을 보고 언급하는 데 익숙하고 이 때문에 사유하는 만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만큼만 사유하고 있다. 각종 소셜 네트워크를 활용해 청정하고 말끔하게 정돈된 일상들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전부라는 듯, 혹은 전부여야 한다는 듯, 드러내 보이는 유행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이 ‘드러내 보임’은 자신감의 표현이기보다는 실은, 그 어떤 곳에도 나를 정박시킬 수 없는 사유의 빈곤함을 드러내는 역설적 현상이다.

 이향아 시인은 ‘드러내 보임’의 영역에 남을 수 없었던 “들고 나는 길목에 팽개쳐진 것들”을 사유하여 주워 올리고 그것들의 “간절한 목소리만 기울여서 들어도/내 딛는 걸음마다 종악이 울릴 텐데”라며 안타까워한다. 이렇듯 “팽개쳐진 것들”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고 드러내 보이려는 시적 태도는 얄팍해진 우리의 사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사유’하게 한다. “지구는 천둥 같은 아우성으로/죽자 사자 해를 쫓아가고 있을 텐데/오늘이 고요히 밝은 줄만 알고/내일이 저절로 오는 줄만 안다/들리지 않는다고 적막이라 하는가”(「나는 어디에 있는가」)

 

 과도하게 투명해진 언어와 얄팍해진 사유들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뻔한 일화’로 만들어버리고 세계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앗아간다. 세계에 대한 사유의 부재는 세계를 점점 더 견고하게 만들고 이는 세계와 겨룰 수 있는 인간의 역량 역시 퇴보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연한 냉소적 체념의 태도는 사유를 포기한 정신들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사유를 포기한 정신들’은 이향아의 시 「나는 요새 아무것도 아니다」에서 구체화된다.     


나는 요새 아무것도 아니다/달빛 안고 다독인 게 언제인지 몰라/별 이름을 불러본 게 언제인지 몰라/낙엽이 쓸릴 때면 추위를 걱정하고/꽃가루 날릴 때면 알러지에 시달려/아침마다 창밖에선 산이 기웃거려도/산이니까 서 있겠지, 눈 밝으니 보이겠지/이런 나를 누가 시인이라 하겠는가/무엇이 시를 막고, 시를 쓰게 하는가/참을 수 없는 상처, 짜고 매운 눈물/그렇고 그렇구나 시시한 하루/나는 요새 아무것도, 사람도 아니다

     -「나는 요새 아무것도 아니다」 전문-     

 

 그러나 시집 <<별들은 강으로 갔다>>의 시적 주체들은 속된 말로 세상에서 쉬운 일은 하나도 없으며 그냥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 단순한 진리를 잊지 않는다. 「보라색 편들기」와 「흐르자고 하던 말」에서는 “보라색”과 “흐르는 물”에도 사유의 부표를 설치해서 사유가 거주할 수 있는 두께와 공간을 확보하고 이로써 “아무 것도 아닌” 존재 혹은 ‘사유를 포기한 정신들’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러한 사유의 부표는 「보라색 편들기」에서는 “왜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어/붉으면 붉다, 푸르면 푸르다라고/죄인을 문초하여 몰아세우듯이” 내 변절을 책망하는 그(세계)에게 “섞어서 둘로 나눠 보라색이 되었어” 라고 답하고 감정을 배제하고 과정이 생략된 건조한 세계에서 “울적하면 돌아서서 후회를 풀어/섭섭한지, 쓸쓸한지 아니면 서러운지/돌아서서 화폭 가득 마음 놓고 문질렀어/오월이면 라일락, 칠월이면 도라지꽃/보라색 그 하나를 눈물겹게 만난 거야”라고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는 시적 태도로서의 근력을 기르게 한다.

 또한 “어디서든 물이 되어 흐르자 했지/흐늘흐늘 살도 뼈도 녹아 없어져/담기면 담긴 대로 끄덕이자 했지/막혔다가 흘렀다가 때가 된다면/느릅나무 그림자가 물결 위에 어리고/소나기 한 바탕 천둥소리 섞어서/해 저물녘 노을 안고 휘돌아 흐르자고/난들 왜 싫겠는가, 열 번이라도 좋아/물이 되어 만나는 일 쉬운 줄만 알고/앞물 따라 천천히 흐르자고 했지”(「흐르자고 하던 말」)라며 “물이 되어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삶의 역설을 깨닫게 하고 “머리 깎고 중이나 되겠다”고 내뱉는 이들에게 “머리만 깎으면 중이 될 줄 아는가/중만 되면 편한 세상 기다릴 줄 아는가/짜디짠 눈물로 창자를 얼간하고/발등을 찍으면서 울어본 적 있는가/죽을 때 남길 말은 생각해 보았는가/툭하면 왜 중이나 되겠다고 하는가”(「머리 깎고 중이나 되겠다고   한다」)라고 되물을 수 있게 하는 것 역시 사유가 지닌 힘이다. 사유의 두께를 확보하는 일은 우리를 일상의 ‘권태’나 ‘허무’로부터 구제하고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표류하는 세상의 언어에게 ‘신뢰’를 부여한다.

 한편, 사유의 빈곤으로 인한 또 다른 현실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시간의 무(無)화’(김민호, 「사유의 시간들-데카르트와 데리다의 경우」, <<문학과 사회>>(30), 2017, p.114)이다. 시간의 폭과 길이는 축소되고 모든 것은 현재화된다. 앞서 말했듯 현대인에게 보이지 않는 과정과 체험의 가치는 평가절하 되어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시간의 경과를 느끼고 경험하는 일은 극복되거나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된다는 의미이다. 동시다발적으로 접근 가능한 파편적 지식들은 ‘늙음’이 ‘젊음’에게 들려줄 수 있는 시간적인 서사들을 생략한다. 이로 인한 젊음에 대한 과도한 강조와 압박감은 인간이 언제나 ‘절정’의 자리나 “꼭대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그릇된 욕망과 환상을 심어준다. 이향아 시인은 이미 현재화된 “꼭대기”보다는 시간적 서사와 과정을 제대로 경험하고 그것이 지닌 가치를 지향하기 위해 “구석지고 낮은 자리”를 자청하는 성숙하고 지혜로운 태도를 내보인다.        


아슬아슬 꼭대기에 휘날리진 않겠어요

평생에 한 번이나 있을까 말까

함성이 몰려오면 막이 내릴 텐데

여기는 천리 밖, 구석지고 낮은 자리

아직 멀었어요, 갈 길이 창창해요

       -「아직 멀었습니다」 부분-     

 

 자연학으로서의 과학은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타당한 원리를, 즉 시간과 무관하게 유효한 원리를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데 반해 형이상학은 ‘시간적 체험’ 그 자체로서 자연학과 대별된다. 그것은 시간 안에서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존립하고 통념과 달리 형이상학적 진리야말로 추상적인 논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 또 다른 삶이라 할 수 있다.(김민호, 앞의 글, p.116 ) 이 때문에 도처에서 과학이 승리하는 현상은 하나의 현대적 징후이고 모든 것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는 시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멜랑콜리커인 시인은 시간의 무(無)화가 침범한 일상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 이향아는 “찬란하지 않은” 시간의 지평들을 뜨는 해와 저무는 해 사이에서 생동감 있게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유리창에 새어드는 생수 같은 하늘/오늘이 선물처럼 도착했습니다/아직은 뜯지 않아 은밀한 시간/(중략)/휘황한 것들은 앞장 세워 보내고/군불 땐 온돌, 이불 깔린 아랫목/불씨를 묻어 놓은 질화로처럼/따뜻한 온기를 다독거리겠습니다/저물면 덕스러운 어제가 되겠지요/찬란하지 않아서, 미덥습니다.”(「찬란하지 않게」) 그리고 인간 현존재의 의미인 시간의 지평들을 “뜨는 해와 저문 해” 사이에서 「오늘과 내일 사이」, 「여름과 가을 사이」로, 나아가 “쫓기면서 반짝이기 몇 광년”(「별들은 강으로 갔다」)으로 감각화하며 순환·반복되기에 영원이 가능한 자연의 시간들로 확장시킨다. 시집 <<별들은 강으로 갔다>>에서 그 시간의 지평들을 경험하고 지켜본 산증인과 같은 존재들이 바람, 풀, 나무, 물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는 이유 없이 세상에 던져져 있고, 미래에 대한 보장 없이 언제나 막막한 無(무)의 바다인 미래에 자신을 기투한다. 더욱이 여기서의 미래란 결국 죽음의 유예상태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실존적인 모습이고 이 실존을 자각할 때 인간은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김동규, 「하이데거 철학의 멜랑콜리」, <<현대유럽철학연구>>(19), 2009, p.94) 시집 <<별들은 강으로 갔다>>에 낙하와 이별을 소재로 한 시들(「가을 열매 같은 이별」, 「충만한 낙하」, 「나무 그늘 나날이 성글어지고」)이 많은 이유도 이향아 시인이 기본적으로 소멸하는 것들에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시적 감수성과 실존적 자각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집을 관통하는 정서는 불안에 의존하고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바람, 풀, 나무, 물과 같은 시적 소재이자 주체들이 인간의 실존적 불안, 즉 소멸과 상실의 아픔을 다음과 같이 생성과 창조로 전환시키는 데 있다.


 “풀은 엎드려서 흙바닥 백리 기척을 알고/(중략)/모두들 떠나고 그만 혼자 남더라도/손가락 꼽아가며 가늠할 수 있을 거다/얼마나 뒤척이면 먹구름이 갤 것인지/얼마나 눈 감으면 봄이 다시 올 것인지”(「풀잎과 바람」) “하릴없이 흔들리다 잦아드는 일/가던 길 어긋나서 사방을 둘러보면/긴 그림자 거느린 나무들이 보인다/소리 없이 나부끼는 숱한 잎사귀/지난 가을 미련 없이 벗어버리더니/매운 봄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겨울 석 달 탈 없이 견뎌낸 나무/땅 밑으로 벋어있는 길고 긴 뿌리로/수백 리 밖 그날도 가늠할 수 있는 나무/죽어서도 무엇이 될 수만 있다면/참으면서 믿으면서 깨어나는 나무”(「나무밖에 없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느릿느릿하게 걷는 이라도, 정도(正道)를 따라가기만 한다면, 달리다가 정도에서 멀어지는 이보다 더 많이 나아갈 수 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정도(正道)를 묻지 않는 현실에서 정도(正道)를 따르는 행위는 쉽게 동일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달라지기 위해서이다. 사유란 다르게 존재하기 위한 고군분투이다. 세계는 뻔한 일화로 가득한 곳이 아니라는 것, 겨울에서 봄이 저절로 오지 않는다는 것. 사유는 하찮고 관습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존재들에 대해 섣부른 판단을 지양하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존재양식과 새로운 시간의 지평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이향아의 시 세계는 ‘시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해 멀리 떠나지 않는다. “그럭저럭 사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지만/그렇다고 그것이 자랑도 아닐 텐데”(「천만다행」)라는 사유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우리가 “꼭대기”나 “절정”에 오르지 않고도 지낼 수 있음을, 희망 없이도 희망을 지속시키며 기다릴 수 있음을 시적으로 보여주고 동시에 “기다리는 시간은 날아가지 않아”(「한두 해인가」)라고 우리에게 속삭인다. 그리고 “찬란하지 않은” 일상과 자연에 대한 사유의 두께를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시적 태도는 누군가 “목소리 낮추어서 안부들 물을 때면/천치처럼 웃을까, 나는 정말 안녕한가”(「천만다행」) 고민하게 하고 되묻을 수 있게 한다. “평안들 하신지, 궁금한 사람들/산은 어제보다 부풀어 올랐는데”(「평안들 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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