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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우혜우 Dec 15. 2021

끊임없이 흐르는 시적 자아에 대한 포용

정희성, <<흰 밤에 꿈꾸다>>, 창비, 2019

 정희성이 <<시를 찾아서>>(창비 2001)에서 말한 대로 세상은 달라졌다. 달라진 세상은 저항의 순결함마저 퇴색시키고 저항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을 저항에서마저 소외시켰다. “저항은 어떤 이들에게는 밥이 되었고/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세상이 달라졌다」) “시가 세상을 바꿀 줄 알았는데/세상이 나를 바꾸어버렸다”(「그럼에도 사랑하기를」)라는 겸손이 담긴 고백적 어투에는 저항마저 빼앗긴 이들이 세상에 적응하면서 보이는 유연성에 대한 자조와 상실감이 묻어있다. 그러나 이 유연성은 세상에 굴복할 만큼 허약하면서도 단번에 굴복하지 않을 만큼의 강함은 가지고 있다.  

 애초에 정희성에게 세상은 노래해야 할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는 베르톨트 브레이트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서 고민했듯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히틀러에 대한 분노)에 대한 시적 충동의 내적 다툼을 치열하게 경험하고 사유한 후 ‘서정’과 ‘현실’에서 불가피하게 ‘현실’을 선택했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현실주의자가 되기는 하여도 본질적으로는 천진한 낭만주의자가 시인”이리고 생각하는 그이지만 여전히 자신의 시적 낭만성을 천진하게 내세우지 못하게 하는 현실 때문에 “매서운 눈초리”를 떨치지 못한다. 그는 제국주의 일본과 친일 친독재 세력에게 나라를 두 번이나 빼앗긴 역사를 잊지 않으며 “개똥이 개똥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절망이 절망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라는 아이러니적 언술로 바로잡지 못한 역사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죽은 파시스트의 피를/가슴 깊이 감춘 여자/그 여자를 무등 태운 어릿광대들이/나발을 불며 거리에서 외쳐댄다/역사는 개나 물어가라!”라는 장면을 연출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주여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풍자하고 “수백명 어린 생명들을/속수무책으로 바다에 수장시키고/사십구재가 지나도록/그 쓴 바다 깊이를 모르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그것은 참살」”이라고 단호하게 발언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의 현실에 대한 매서운 눈초리와 단호한 발언을 섣불리 단정 짓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가 ‘서정’과 ‘현실’에서 현실을 선택한 것은 본질적으로 시대의 불의와 맞서서 싸우다 죽은 용감한 사람들의 영혼에게 바치기 위해서였다. 이는 자신에게 존재하는 여러 시적 자아의 목록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검토하면서 자신과 타자를 위해 구원을 걸만한 진정하고 강력한 깊은 시적 자아를 현실로 추구한 것이다. 그가 매서운 눈초리로 현실을 바라볼 때 그가 불가피하게 억누르고 내세우지 못했던 천진한 낭만성을 우리는 함께 보아야 한다. 그의 시가 현실을 선택하고 주목한다고 해서 서정이 배제되는 것이 아님을 천둥의 충격은 그 직전에 사라진 고요의 느낌과 함께 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희성 시인은 “구정물통에 박씨 하나”(「박씨」)가 “「그네들만의 축제」”를 벌이는 상황에서 “너는 블랙리스트라고/영광이 아니냐고”(「영광」)라고 누군가가 속삭일 때 칠십 년 전 보도연맹 사건을 떠올리는 현실 인식과 지각을 가지면서도 다음과 같이 서정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자 한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된 지 오래되었지만

오늘 나는 <<공산당선언>>이 다시 읽고 싶어진다

(중략)

잠이 오지 않는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은 이것뿐

내게 노래가 없다면

내게 꿈마저 없다면

나는 무엇인가

마지막 한줌의 힘이 빠져나갈 때까지

나는 이것을 손에서 놓지 않으리      

               -「독서일기2」부분-     

 

 자신이 불가피하게 억눌렀던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시는 자신과의 싸움이라는데/나는 남과 너무 오래 싸워왔다”(「그럼에도 사랑하기를」)라는 성찰과 반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무엇에 혈안이 되어 살아왔던가” 자문하고 “살아오는 동안 눈물이 바닥나버렸다/슬프다 슬픈 일을 당하고서도/눈물 한방울 흘릴 수 없게 되었으니”(「마른 눈물」)에서 알 수 있듯 정희성은 저항마저 빼앗긴 이들이 이제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슬픔이라는 감정도 회복할 수 없게 된 이들의 일상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리고 고도로 자본화된 소비사회 안에서 효용성이 큰 ‘상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정직하고 투박한 경험과 노동에 주목하여 그 ‘정직함’을 ‘시적인 것’으로 이끌어내고자 한다. 무차별적으로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일상화되는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시’도 예외일 수 없다. 상품 도장이 찍힌 시적인 것들 속에서 본질적으로 ‘시적인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 정희성은 그 “인정”의 그물망에 걸리지 못한 존재들을 불러내서 다시 ‘시적인 것’ 그리고 ‘시’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 묻는다.     


사람들은 그의 손이 너무 거칠다고 말한다  

손 끝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살아온 손이 저 홀로 곱고 아름답지 아니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작 세상을 아름답고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기름때 묻고 흙 묻은 손이다     

시는 어떤가        

                                                       -「그의 손」 전문-     


 이러한 사유는 「그의 손」의 “흙 묻는 손”에 이어 「동강할미꽃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에서 “농사꾼의 딸로 태어나 일찍 머리가 희어진 동강할미”, 「가보세 가보세」에서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리”라는 갑오농민군의 노래 한 구절, 「너븐숭이」에서 제주 4·3 사건에서 희생당한 “두 살배기 어린 생명”, “순이 삼촌”으로 구체화되면서 연민과 슬픔의 감정을 복귀시킨다. 이것은 주목받지 못한 존재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과 감각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독립과 존엄의 지위를 부여하려는 시인의 노력이자 흔적들이다.

 그러나 ‘시적인 것’ 혹은 ‘시’에 대한 추구가 항상 구체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정희성은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시를 찾아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평생 달려왔지만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못하였네                   

가여운 내 사람아                                      

이 황홀과 쓸쓸함 속에

그대와 나는 얼마나 오래

세상에 머물 수 있을까    

   -「가을의 시」 부분-        


가여운 내 사랑 숲속에 두고 왔네

나무들이 그걸 기억하고 있으리

그대와 나의 숨결 어린 깊은 그곳에

나 돌아가 새가 되어 노래하리        

  -「비밀정원」 전문-     

 

 그가 원하는 세상은 아마도 자신의 낭만적 서정성을 천진하게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 세상을 위해 평생 달려왔건만 시인은 아직 도착하지 못하였다고 노래한다. 그리고 가여운 내 사랑인 또 다른 ‘시적인 것’은 마음속 깊은 비밀정원에 두고 언젠가 새가 되어 돌아가 노래할 수 있는 순간이 도래하기를 바란다. 현실과는 다른 본래적인 시적인 것에 대한 추구는 아마도 부단히 유예되기에 그 상실감은 더 심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자나 깨나 시를 생각하는 24시간 노동자”로서의 시인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고 그래서 “내가 할 일 없어지는 게 두렵게”(「반성」) 만드는 시적 파토스로 작용할 수 있다.  

 기표의 범람 속에서 말을 내놓았다가 자조적으로 남보다 앞질러 그것을 스스로 뒤집는 사람들이 많아진 현실이다. 어차피 소통할 수 없다는 체념이 만연한 탓인데, 이런 세태 속에서 정희성 시인이 문장을 온전히 맺고자 선택한 것은 시인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고 듣는 사람”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일찍이 정희성은 “나는 말하는 법을 새로 배워야겠다”(「말」, <<詩를 찾아서>>, 창비, 2001)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 지점에서 “그늘을 견디는 연습을 오래 해오는”(「음지식물」, <<그리운 나무>>, 창비, 2013) 또 다른 시적 여정을 경유한 후 새로운 시적 습관을 세우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새의 목소리를 빌려/나무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네/그리고 그들의 말을 받아쓰네/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어린 손녀가 창밖을 내다보며/저 혼자 하는 말도 받아 적네”(「나는 자연을 표절했네」)라며 어떤 언어들이 의식화되기 전에 나타나는 순수한 감각들을 붙잡으려고 한다. 기억과 습득된 연상이 많은 이들이 지니는 고착화되고 관습화된 언어와 사유를 넘어서고자 봄은 “영산홍은 말고/진달래 꽃빛까지만”(「연두」) 만끽하고 연두는 변하기 쉬운 색이지만 “돌이켜보면 지난날/우리도 한때 연두였음을/기억하게 되는”(「다시 연두」) 절제와 관용의 태도를 내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절제와 관용의 시적 태도는 “흰 밤 창밖으로/한없이 너른 벌판을 바라다보며” “불현듯 내가 다족류 벌레처럼 작아졌다”라는 겸손의 태도로 나아가고(「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시베리아 벌판을 바라보며” “칭기스칸”, “소떼”, “감자농사”, “벌목”이나 “도시”, “이준 열사”를 떠올리는 일반적인 연상과 감상에서 벗어나 “시베리아를 그냥 좀 내버려두면 안돼?”(「흰 밤에 꿈꾸다」)라는 시적 자아의 목소리를 찾아내게 한다.

 의식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시적 자아도 의식을 따라 같이 흐른다. 흐르는 시적 자아의 각 부분은 그전에 흘러간 모든 자아를 알고 있다. 따라서 이 흐름의 각 부분은 그 당시 시인이 선택한 시적 자아로서 우뚝 서 있다. 그러면서도 이 흐름의 각 부분은 과거의 전체 흐름과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럼에도 정희성의 시적 자아는 하나의 생각이다. 매 순간 그 전 순간의 생각과 다르지만 그 전 순간의 생각은 물론이고 그 전 순간의 생각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는 그런 생각이다. 마지막 자아를 소유한 사람은 그 마지막 자아 앞에 있었던 자아까지 소유하고 있다. (윌리엄 제임스, <<심리학의 원리>>, 부글 books, 2014, pp.271-272)

 그러므로 우리는 정희성이 매서운 어투로 현실을 언급해도 따뜻한 서정을 느낄 수 있고 그가 낭만적 사랑을 노래해도 차가운 현실을 읽을 수 있으며 그가 자연과 아이들, 지인들의 언어를 받아써도 그의 발화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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