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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우혜우 Dec 15. 2021

과거와 현재의 새로운 자리매김하기

유자효, <<신라행>>, 동학사, 2021

 「신라행 新羅行 1」의 첫 문장들은 이렇게 시작된다. “천 년을 거슬러 신라로 간다/천리를 더듬어 신라로 간다” 이 시점에서 시인 유자효는 왜 신라로 간다고 했을까. 코로나19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질병에 맞서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다. 아마도 요즘 전 세계 사람들이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코로나 확진자 확인일 것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출근은 물론 대중교통도 탑승할 수가 없다.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 사람들이 모두 같은 것을 소지하거나 착용하고 있는 상황을 마주한 경우가 있었던가. 이뿐만이 아니다. 2020년 1월 이후 주식 매매거래를 일시 중단하는 사이드카와 서킷브레이커가 몇 분 사이로 발동됐고 대부분의 조직은 비대면 업무 범위를 확대했다. 경제위기와 바이러스라는 유례없는 난제를 맞닥뜨린 현실을 두고 유자효는 “세상이 아픕니다”라고 짚어낸다.

     

세상이 아픕니다/병든 세상을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닙니다/세상이 병들었는데/마스크 한 장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사람들은 위안합니다/겸허하라고 서로 사랑하라고/세상이 앓아가며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싸웁니다/마스크를 쓰고서도 싸웁니다/자신이 이미 병들어 있는지도 모르고/탐욕에, 미움에/골수까지 파먹혀 들어가고 있음을 모르고/남은 날이 얼마인지도 모른채 악착같이 싸웁니다/병든 세상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세상이 무너지는데/마스크만 쓰면 된다고/마스크를 쓴 채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싸우겠지요/세상이 아픕니다/시간이 얼마 없습니다/세상의 병부터 고쳐야지요/부디 고쳐야지요//

                             -「아픈 세상」 전문-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문제적인 상황은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가 강조되는 현실에서 ‘사랑’도 아이러니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사랑한다/이 말 한마디에 그렇게 많은 침방울이 튀는 줄 몰랐네/그 비말이 그대 입속으로 들어가는 줄 정녕 몰랐네”(「비말」) 어쩌면 우리는 기존에 ‘사람다움’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잃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시적 형상화라는 작업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에 대한 위기감에서 추동되기도 한다. 유자효 시인은 “말조차 비말이 돼 병이 돼”는 시간을 견디는 방식으로 <<신라행 新羅行>>을 택한 것이다.  

   

그곳은 찬란한 꿈이 깃든 곳/진륜성왕의 꿈과/부처의 꿈이 함께 깃든 곳/살아 이상향을 이루고자 했던/장부들과 신녀들의 땅/한반도에 사람이 살면서부터/가장 나라다웠던 나라/황금의 나라/대륙의 북방에서 온 사람들과 바다 건너 남방에서 온 사람들이/가족을 이루어 함께 살던 곳/천 년을 거슬러/천 리를 더듬어/찾아가는 신라/언제 돌아보아도 슬프지 않은/자존의 땅/신라 사람들//

                         -「신라행 新羅行 1」부분-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가 역사의 불운을 덮는 방식으로 세계사적 보편성에 의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우리의 민족사인 신라와의 연결지점을 찾아내서 희미해지는 보편적 휴머니즘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기대 지평을 만들어 낸다. 그는 신라를 “가장 나라다웠던 나라”이자 “대륙의 북방에서 온 사람들과 바다 건너 남방에서 온 사람들이 가족을 이루어 함께 살았던” 온전한 국가 공동체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호랑이와 표범과 늑대의 터전/그들과 함께 살면서/대화하고/정을 나누고/사랑도 하고/사냥도 하던/속 깊고 용감한/신라 사람들”(「백두대간-신라행 新羅行11」)이라고 노래하기도 한다. 유자효는 인간과 인간이, 사람과 세계가, 생활과 환상이 서로를 감싸며 포옹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숨기지 않는 듯 보인다. 자칫 이러한 과거로의 지향은 안이한 노스탤지어의 몸짓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지만, 아직 속단은 이르다. 다음의 시들을 보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세례 요한을 목/잘라 죽인 유대인/그 하느님을 대중 선동가라며 못 박이 죽인 로마인/지구가 돈다는 코페르니쿠스를 종교재판에 넘긴 사제들/숱한 사람들을 마녀라고, 유언비어라고 처단한 독선가들, 독재자들/시간의 걸음망을 통과한 뒤에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들/함부로 속단하지 말아야 할/가짜뉴스란 이름의 함정//

                     -「가짜뉴스」 전문-     

그들도 장사를 하고/벼슬을 하고/여인을 만나/자식 낳아 기르며/사람 살던 땅 위에 이룬 도솔천/정년 금강의 빛이었구나//

                  -「금강金剛의 빛」 부분-     

 

 우리는 거짓이 뉴스처럼 유통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문제는 포장의 기술이 정교해져서 진실보다 더 진실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가짜뉴스의 역사는 언어가 발생한 역사와 함께할 만큼이나 길고, 어찌 보면 우리의 역사는 곧 가짜뉴스에 대한 투쟁의 반복으로 여기까지 왔을지도 모른다. 시 「가짜뉴스」에서는 당대 가짜 뉴스의 피해자가 된 역사적 인물들을 나열한다. 세례 요한, 예수, 코페르니쿠스, 마녀라고 처형당한 숱한 여성들이 바로 그들이다. 물론 이들이 피해자라는 입장을 획득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의 걸음망을 통과한 뒤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투쟁을 통해 가능했다. 그 투쟁이 항상 거친 싸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어떤 인물이나 문화가 의심스러울 때, 우리의 의혹은 익숙한 것들을 넘어서서 우리의 인식을 넓혀가는 한에서만 해소되거나 완화된다. 그렇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역사에 몰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이 성장해온 현재의 사고와 어휘에 고착되는 일을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유자효의 신라행은 역사의 참된 의미를 설파하려는 것도 아니며 역사 안에 감추어진 문학적인 맥락을 평가하려는 작업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현재를 다른 시간의 맥락 속에 인간을 다른 인간들의 맥락 속에서 새롭게 자리매김하기 위해 시적 작업으로서의 ‘신라행’을 감행한다. 그러한 재배치는 새로운 관계들을 오래된 관계들 속에 자리매김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현재의 사람들과 옛사람들 모두에 대한 우리의 사유를 수정할 수 있다. 그래서 “왕의 할배는 장성長城의 밖/추운 나라 흉노匈奴를 다스렸었네/해 뜨는 동쪽까지 말 타고 와서/꿈꾸던 나라/서울의 집들은 기와를 덮고/신화는 흘러 노래가 되고/서역의 사람들이 배 타고 오던/아득한 비단길/끝이자 시작”(「금강金剛의 빛」)인 곳이 대한민국이자 신라가 되는 새로운 자리매김이 창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작업은 우리의 고착된 사유와 언어를 바꾸고 나아가 우리의 윤리적 정체성을 수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가 “나의 주인은 나다”(「미륵의 시대-신라행 新羅行 8」)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아를 찾기 위해 외부로 떠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관점에서는 신라와 연결지점을 가진 우리가 곧 우리의 자아이다. 현재 우리가 ‘아프고 불행해도’ 견딜 수 있다. ‘위기’에서 오는 ‘불안’과 ‘근심’은 지금의 현실을 보완하고 조금이나마 낫게 만들기 위해 ‘신라행’을 감행하는 창조적 작업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세계를 향한 노력은 원하는 세계를 넘어서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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