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옥의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 문학동네, 2018
슬프게 미쳐 버렸다고나 할까,
환상과 현실과의 거리조차 잊어버려서 아무것도 구별해낼 수가 없게 되었고 사람을 미워하는 법을 배우고 말았다. 아아, 그들을 죽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떠나든지 해야 했다.
-김승옥의 「환상 수첩」 중-
1. 반복되기에 익숙하지만 여전히 낯선 ‘슬픔’이라는 정념
한영옥의 시집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의 시적 주체들은 저 글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현실과 환상의 혼란에 빠져 소금물에 콕 쳐 박혀 죽어버린 주인공(환상수첩)의 무모함에 경의를 표하며 아주 담담하게 다독이지 않았을까? 방황하지도 말고 괴로워하지도 말고 그냥 내버려두지. 그렇다면 더 좋지 않은 일들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차 한 잔 비우고 사람 몇 버리고/가벼운 몸으로 나서면 되는 것”(「뚝, 그치고」)인데.
물론 정념의 순수함에 몰입한 나머지 거짓과 포즈로 난무한 현실로 돌아오기를 거부하고 심연의 구덩이로 기꺼이 투신하는 낭만성은 젊음이 지닌 매력이자 특권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십 번 치르는 상처의 기억을 서랍에 접어넣고 다시 일상으로 방향을 틀어 나아간다. 한영옥의 시집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은 ‘정념의 정직성’과 ‘아닌 척하는 것들 속셈’(「길바닥, 노란 꽃들」)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노력하는 윤리성의 시학을 보여주고 있다.
오랫동안 알고 신뢰했던 관계들이 곁에 존재하면서도 조금씩, 변절해간다는 사실을 감지할 때, 그 관계에 대한 미세한 균열과 전향의 기미가 다가올 때,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는 불안과 동시에 익숙하고도 낯선 슬픔의 감정을 느낀다. 이 슬픔은 관계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타자들이 경험하는 상처와 고통, 굴욕의 구체성에 대한 감수성과 감각이 좀 더 예민한 사람의 몫이다. 그리고 친숙했던 관계가 낯설어지는 설움은 살면서 접하는 낯설지 않은 정념이지만 아무리 단련하고 무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서서히 그러다 갑자기 어느 시점에서 온통
붉어져서 점멸하며 떨어지는 꽃사과들처럼
당신은 절차대로 붉은 등을 보인 것인데
적신호라면 이제쯤 낯설지 않아야 할 터인데
그는 당신 등이 낯설다고 울음 터뜨리더라
-「센티멘털리스트들」 부문
익숙하고도 낯선 설움들은 한영옥의 시에서 색채, 소리, 기억, 통각으로 매우 다채롭고 감각적인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센티멘털리스트들」에서는 ‘붉은 등’이라는 색채감각으로 표현되었다면 「툭툭」이라는 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청각적 감각이 두드러진다. “멋쩍어 얼른 칡넝쿨을 끊어내는데/툭툭 잘려나가는 소리 바싹 낯익다//익은 소리에 귀 대어보는데/귓바퀴 굴리는 멍한 설움만 질기다.//” 특히, 「매운 밥 한 알이」라는 시에서는 ‘설움’이라는 감정과 정서의 발생을 몸에서 일어나는 생리학적 반응뿐 아니라, 정신에 끼치는 효과로까지 시적 형상화를 함으로써 철학적 개념인 ‘정념’을 육체화한다.
맵게 비벼서 성급하게 한술 먹더니/매운 밥 한 알 잘못 넘어가더니/재채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젖은 연기 삼킨 듯 목이 매캐하더니/모르던 아픔 맛이 그득 차오른다/그간 어떤 방식을 빌려서든/치명(治命)을 지시하고서야 고통은/잦아들어가곤 하였을 것이다/계속 끌려가고 있는 재채기가/어디까지 갈 것인가 두려워/숨 놓아야지 고개 꺾으려 할 때/겨우 잦아지다 사라지는 재채기/이와 같은 절차의 도식들 기억한다/한 도식이 그친 뒤의 저녁, 어둡다/죽을 맛들이라면 아직 푸짐하다며/치명의 길에 눕는 밤, 캄캄하다.//
-「매운 밥 한 알이」 전문-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정념이란 외부 대상을 수동적으로 지각할 때 생겨나는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등의 다양한 감정 혹은 정서를 뜻하지만 ‘정념’이라는 말은 감정이나 정서라는 말보다 인간이 외부 세계를 ‘수동적’으로 지각한다는 점과, 감각 지각이 인간 내부에 야기하는 감정적 ‘동요’의 효과를 더 잘 포착하고 있다.(최슬아, 「데카르트 사유에 나타난 미적 경험의 가능성: <<영혼의 정념들>>(1649)을 중심으로」, <<美學>>(83), 2017, p.222) ‘붉은 등’, ‘툭툭 잘려나가는 소리’, 반복되는 상처의 고통으로 인한 ‘절차의 도식들’에 대한 기억은 분명 ‘죽을 맛들’이며 시적 주체로 하여금 세계를 캄캄하고 ‘치명의 길에 눕는 밤’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주체는 “머리끝까지 저릿한 걸 보니/많이 참은 것이다” “그래도 한 번 더 주춤거리다/가지런하게 문 닫아주고” “마음의 네 귀퉁이 단단히 잡아/마음을 착착 접고 마는 사람들/오늘도 여기저기 쿡쿡 박혀 있으니/나도 한자리 배정받은 것이니” “내리는 눈발이 포근하리라는” 막연한 “근거 없는 바람”을 “이젠 뚝 그치고서”(「뚝, 그치고」) 어쩌면 환상에 불과한 기준으로 세계를 바라보았던 낭만적 과오를 멈춘다.
2. 정념에 의존해서 관대함 획득하기
한 관계의 변절이 앗아가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충만함의 세계를 공허로 대체해버린다. 관계에서 상처 받은 자들은 그 공백의 구멍이 정념으로 채워지는 ‘어둠’과 ‘죽을 맛들’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그 상처들이 나 자신을 보호해 줄 거라 믿어보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도 곧 깨닫게 된다. 반복되는 부정적인 정념에 대한 ‘절차의 도식’들은 관계의 단절을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들로 여기게 만들어줄 거라 일시적으로 여겨보게 하지만 그것은 포즈에 불과한 것이다. 「섭섭지 않다」라는 시에서의 “섭섭지 않다”라는 발언은 그래서 아이러니적 언술이다. “아, 더는 낮아질 수 없는 한숨 쪼개며/끝까지 타고 가려던 한 세월도 쪼개”보지만 “더이상 손잡지 않겠다는 기미”를 알아채는 일만은 여전히 괴로운 일이다. “알고도 모르는 척 잠잠하다가/겨우 알아듣는 척 뒤척였으니/헛기침은 이제 그쳐도 좋겠다/”라며 파생하는 정념에 대한 회피기제로서의 “헛기침”을 스스로 인정한다.
캄캄한 밤, ‘죽을 맛들’에 휩싸여 ‘치명의 길에 누워버린’ 정념의 정직성에 충실했던 한영옥의 시적 태도는 그 인정의 시간 이후에 “적막을 내다보며” 관조할 수 있는 여유와 거리감각을 획득한다. 대체적으로 무사한 일상을 유지하고 싶다면, 정념에 휘둘려 상처 받고 싶지 않다면, 타자가 나의 삶 속에 너무 깊이 개입하게 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면 된다. 언제까지나 머리끝까지 저릿하면서 정념의 치명적인 재채기에 끌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의미에 조금은 무감각해지고 평온 가운데 잠잠한 상태를 지향하는 태도로도 삶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 것이다.
홀로 있을 컴컴한 밤에 환하게 펼쳐놓고서/시끌벅적 재미있게 한바탕 잘 놀려는 속셈으로/좋은 사람들이라 생각해온 몇과 어울려/좋은 풍경이라 생각해온 풍경에 푹 들어/하루를 길게 잡아당겨 잘 싸두었습니다/바라던 적막도 지쳐 종일토록 퀭한 눈으로/커튼이나 올렸다 내렸다 기다리는 시늉할 때/피시식 삐져나와줄 두둑한 웃음보따리/이 구석 저 구석에 갈무리해놓으려는 욕심에/하루의 귀퉁이를 요모조모 잡아 늘였습니다/그날 좋았던 하루 행여 녹아버릴까보아 그러다가 가뭇없어질까보아 조바심 무성하여/그후로 좋은 사람들이라 생각해온 몇과/드문드문 조심조심 얇게 지냈던 것입니다/그러다 슬며시 연락이 끊겼던 것입니다/내다봤던 일이라 잔잔하게 흘러갔습니다.
-「적막을 내다보며」 전문-
「적막을 내다보며」에서는 진정성의 에토스가 피상성의 에토스로 전환되는 과정이 드러난다. 진정성의 에토스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오리지널’에 대한 추구는 때로는 편견이 될 수도 있다. 진정한 삶의 방식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결국 ‘유일성’으로 귀결되는데, 유일성만이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고결함과 우아함은 나머지를 모두 모조품이나 경박함으로 규정해버리는, 새로운 배제를 파생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는 “좋은 사람들이라 생각해온 몇과 어울려” “좋은 풍경이라 생각해온 풍경에” 과도한 진정성과 영원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저 “시끌벅적 재미있게 한바탕 잘 놀려는 속셈으로” 그러나, 그럼에도 “그날 좋았던 하루 행여 녹아버릴까보아” 조바심 내며 조심할 줄 아는 감성과 배려는 차마 버리지 못한다.
과도하게 넘치는 정념을 조절하는 행위는 수동적으로 수용되는 정념을 의식화할 수 있는, 인간이 지닌 능동성의 영역이고 능동성은 ‘의지’ 곧 ‘이성’의 사용과 연결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과도한 정념에 대한 영혼의 규제가 이성을 통해 인간을 ‘무정념’의 상태로 유도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념에 대한 조절은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통제하고 억압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이로운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조율해나가는 역동적 과정 그 자체에 의의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데카르트는 오히려 “삶의 모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정념에 의존”한다고 간주하고 정념을 제대로 사용할 때 삶의 지복을 누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정념의 선한 본성을 유용하게 쓸 수 인간은 ‘관대함의 덕’을 획득한 사람이다.(최슬아, 앞의 논문, p.232-233)
그래서 한영옥 시인은 “초록 옆의 빨강처럼” “명석한 판단”을 하는 이라고 스스로를 자신하지는 않지만 “단단한 침묵”의 가치를 배제하지 않고 “넘치는 것들에 대한 혐오를 충분히 공감하는” “‘느낌’”(「그만한 사람」)만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단단한 침묵’과 ‘느낌’에 대한 시적 지향은 “언질도 없이 표정을 바꿔버린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당황하며” 걷는 누군가에게 “빛나는 사람들 빛으로 지나가다가/어두운 사람들 어둠으로 지나가다가/빛나던 사람이 어두워지며 가기도 하니/어둡던 사람이 빛나며 가기도 하니/아무 판단도 내두르지 않고 양손에 힘주면서/단지 네가 있을 뿐임을 공손히 받들었으면 한다”라는 깨달음을 전해줄 수 있는 관대함의 미덕을 보여준다.
우리가 경험하는 의식의 흐름에는 분명 ‘실체적인 부분’과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 파악되기 어려운 ‘불분명한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흔히 두 가지 태도로 대응한다. 하나는 ‘불분명한 부분’에 비해 ‘실체’를 필요 이상으로 과대평가하는 감각주의자가 되거나 ‘불분명한 부분’을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주지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한영옥의 시들이 지닌 관대함의 미덕은 이 극단으로 향하는 과격함을 지양하고 ‘불분명한 부분’에게도 일정 부분의 합당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버려진 것이라면 분명 까닭이 있겠는데/미처 깨달아내지 못한 뭣이 뾰족하겠는데/황망하게 사방을 둘러봐도 등 비빌 데 없었고/봄이 오면 이곳도 꽃물결 찰랑댈 거라는 짐작뿐/겨우 그뿐, 우둔하게 땅만 보며 짐작이 가난했으니/매끈한 대열에 끼어든 것 애초에 무리였으니/(중략)/한 해 두 해 답답하다 오백 년 다 돼가는 느티나무/그냥 그 자리에서 꽃 짐작만 거듭 환해질 뿐/헤헤거리며 앞지르기 잘했던 전생(前生)은 깜깜할 뿐.
-「우둔」부문-
객관적이고 명확한 감각이나 이미지, 그리고 인지들을 평가절하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것들이 우리 마음을 구성하는 전체에서 보자면, 작은 일부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의미이다. 감각이나 이성만의 관점에서는 답답하고 우둔한 ‘불분명한 것’들은 ‘꽃물결’이라는 자유로운 유동성을 지닌 ‘짐작’으로만 환하게 파악될 수 있다. 우둔하게 오백 년의 세월을 버틴 느티나무의 시적 가치는 그 관대함의 덕으로 인해 “헤헤거리며 앞지르기 잘했던” 약삭빠른 인간 전생의 ‘깜깜함’을 환하게 앞지르면서 ‘아닌척하는 속셈’을 넘어선다.
3. 오너라! 슬픔
한영옥의 시집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은 판단이 지시하는 옳은 일을 행하고 감정에 충실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삶이 정당한 보상을 돌려주지는 않는다는 인과의 공허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의 시들은 타자에게 “눈밭을 걸으며 어둠을 걷어주려고” 애쓰는 나의 선한 노력조차도 “변명이 아니라면서도 끈질기게 변명하는 소크라테스”의 변명 혹은 “부산스러워지며 들뜨는 감성”에 불과한 것들로 만들지 않기 위해 판단을 지연시킨다. 이 지연이 우유부단함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저것이 눈밭인 줄 몰랐을 지구의 첫 기침에서/캄캄했을 나의 혼란, 가끔 어지럼증으로 온다/아찔했던 한 오라기의 공포, 그러나 뒤이어/정신은 흰 눈의 보드라움을 깨치며 안도했으리/낮과 밤을 베풀며 지구는 어느덧 다정해졌고”(「다행이다, 정신」)에서 알 수 있듯 ‘혼란과 공포’가 ‘안도와 다정’이 되는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은 정념에서 관대함까지의 시적 여정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경험과 감성들로 친밀하게 접근하여 깊이 있게 성찰하여 이루어낸 작품이다.
우리의 감정은 그 대상의 일부 부분들에 관심을 두고 나머지는 배제하려는 성향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대상의 부분들을 환영하거나 거부하면서 선택을 한다. 우리가 마음속에 전형적인 성격이나 정상적인 크기, 적당한 거리, 표준적인 색깔 등에 대해 특별히 정해놓지 않은 대상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념은 타자와 세계에 대해 ‘환영’할 것이진 ‘거부’할 것인지에 대한 솔직하고도 정직한 수동적 반응이다. 이 수동적 반응인 정념의 선한 본성을 정직하고도 유용하게 쓸 수 인간이 바로 ‘관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마음속의 ‘관심’과 ‘배제’에서 배제의 영역을 축소시킨다. ‘관대함’을 획득한 이들은 내몰았던 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이 “뿌옇게 번져”오는 상황이 되면 손잡아주던 고마운 이들을 “또렷”하게 되살려 “모진 겨울 터널, 두려움 버리고 뚫어가”는 삶의 지혜를 얻게 된다. 또한 “어제의 괴로움 짓눌러주는/오늘의 괴로움”(「여간 고맙지 않아」)에 대해서도 고마워할 줄 아는 생의 아이러니를 받아들이고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이 오면 어둡고 습한 곳에 홀로 있지 않고 “오너라 슬픔/쑥 이파리 태워 매운 눈 비비며/꺽꺽 같이 죄다 울어버리자”(「오너라 슬픔」)라고 호탕하게 대응할 줄 알게 된다. “한 능력이 떠난 뒤/또 한 능력이 찾아와”(「또 한 능력이 찾아와」) 나는 관대한 인간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소모하는 정념들이 내면을 고갈시킨다면 절제하는 관대함은 내면을 고양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