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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우혜우 Dec 13. 2021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에 대한 또 다른 그림자

안현미, <깊은 일>, 아시아, 2020

                              

1. 남은 전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고 있는 이들을 위해 새로운 어휘 만들기     

 

 시집 <깊은 일>의 서두 몇 편의 시에서 안현미는 세월호의 슬픔을 다루고 있다. 특히, 시 「깊은 일」과 「세월호못봇」을 통해서는 스스로 아이러니스트를 자처하고 있다. 아이러니스트가  함께-있음을 실감하는 것은 공통의 언어가 아니라 <바로> 고통에 대한 감수성, 특히 짐승들이 인간과 공유하지 못하는 특별한 종류의 고통, 즉 굴욕에 대한 감수성이다.(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민음사, 1996, P.178) 로티에 의하면 인류의 연대성은 공통의 진리나 공통의 목표를 공유하는 문제가 아니라 공통된 사적인 희망, 자신의 세계-사람들이 그것을 둘러싸고 자신의 마지막 어휘를 직조한 자그마한 것들-가 파괴되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공유하는 문제이다. 

 세월호 사태에 대해 정부 대책으로 내세워진 것들 다시 말해, 상식이라는 허울을 쓰고 공통의 언어로 작성된 “특별 대책과 특급 망언”들은 세월호 희생자들과 남겨진 가족들을 더 굴욕적으로 만드는 언어들이다. 하나마나한 말들로 위장된 “유사 대책과 유사 눈물”인 것이다. 이 언어들은 생에 의해 더럽혀질 기회조차도 갖지 못하고 수몰되어 버린 세월호 학생들에 대한 눅진한 애도는 고사하고 자식을 잃은 슬픔과 고통에 빠진 사람들의 형언할 수 없는 절망을 시시하고, 진부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림으로써 굴욕을 준다. 그 굴욕은 자식을 잃은 슬픔 이상으로 더 배가 되어 남겨진 가족들에게 오래 지속되는 고통이다.

 본래 고통은 비언어적이기 때문에 슬픔과 굴욕이 뒤범벅된 고통은 차마 언어화되기 힘들다. 그러므로 희생자들, 즉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스스로는 언어를 통해서 할 일이 많지 않다. 희생자들이 한때 사용했던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언어는 그들에게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며, 의미를 갖기 힘들다.  그들은 기존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낯선 고통을 언어와 결합시킬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많은 수난과 굴욕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상황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은 그들을 위하는 다른 사람에 의해 행해져야 할 몫이다. 안현미 시인은 시인으로서 그 몫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끝내기 위해서는 시작해야만 한다고 쓴다 끝날 줄 알면서도 시작했다고 쓴다 그리하여 개조해

야 할 특별 대책과 특급 망언들만 부표처럼 떠 있는 맹골바다 속으로 세월호는 침몰해야만 했

다고 쓴다 100일이 넘도록 오직 진실을 알고 싶다며 눈물이 입구에서 절망의 입구까지 애통하게 견뎌온 엄마들이 있다고 쓴다 이제 그만 유사 대책과 유사 눈물에 최선을 그만 두자고 

쓴다 최악을 그만 두라고 쓴다 그게 뭐든 누구든 희망 고문은 그만 닥치라고 쓴다 진보도 보

수도 멀었다고 쓴다 제발 그리운 이름 옆에서 살고 싶다고 쓴다 죽고 싶다고 쓴다 내 새끼가

너무 보고 싶다는 말이 못이 되어 박혔다고 쓴다 돈이 되는 건 다 판다더니 정말 다 팔았다고

쓴다 지옥까지 팔았다고 쓴다 그게 뭐든 누구든 내 새끼가 보고 싶다는 말에 못박혀야 한다고 

쓴다 죽어도 죽어도 죽을 수는 없다고 쓴다 죽어도 죽어도 다시 죽을 때까지 시작해야만 한다

고 쓴다

                                                           -「세월호못봇」 전문-     

 

 아이러니는 상식의 반대말이다. 상식이 고통에 빠진 사람들에게 굴욕을 주는 상황 속에서는 아이러니로 대응하여 희생자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는 “고정된 자리가 없는 문장을 발언”해야만 한다. 그래서 안현미는 “끝내기 위해서는 시작해야만 한다고 쓴다 끝날 줄 알면서도 시작했다고 쓴다”라는 문장과 “아무래도 이번 생은 나부터 죽고 봐야 겠다/그리고도 남는 시간을 삶을 살아야 겠다”(「깊은 일」)라는 문장으로 아이러니를 창출하며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와 위로를 표한다. 그리고 “누구든 내 새끼가 보고 싶다는 말에 못박혀야 한다”(「깊은 일」)라는 문장과 “울음의 연대”(「수학여행 가는 나무」)라는 어구로 고통과 굴욕에 대한 공통된 감수성의 인식을 확장함으로써 “특별 대책과 특급 망언”을 개조하는 진정한 사회적 유대와 연대를 만들어낸다. 그녀는 연대성은 이미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듣게 되면 우리 모두가 깨닫는 원초 언어의 형태로 된 자그마한 조각들로 구성(리처드 로티, 앞의 책, P.181)되어야만 한다는 아이러니스트로서의 시적인 원칙을 지키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아이러니스트로서의 시적인 원칙은 비단 세월호 희생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 난민…과 같은 누군가에겐 짐승만도 못한/태어났는데 죽은 듯이 살아야 하는 산낙지 술안주 같은 나의 다정한 계급들”(「변신」)이라는 메타포로 드러나며 확장된다.     


2. 문, 그런데 우리는 광장에 갔듯 혁명 곁으로 가고 있습니까?      

 

  2000년대 한국에서 사회적 관계와 제도의 어휘 전체가 단기간에 뒤바뀌는 거대한 ‘혁명’을 실현시키기는 어렵다. 안현미 시인도 이를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혁명을 이룰 수 있습니까?’라고 묻지 않고 “혁명 곁으로 가고 있습니까?”(「주문」)라고 묻는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는 혁명으로 가는 것보다 혁명 곁으로 가기 위한 과정과 절차가 중요할 수 있다는 사유의 변화 역시 담고 있다.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에서 혁명 곁으로 가는 길은 거대 시스템에 관련된 거친 변화보다는 오히려 현재 “우리가 뭘 원하는지 우리가 뭘 그만둘 수 있는지”를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공유할 수 있는 “「생활문화진흥」”의 형태가 된다. 혁명 곁으로 가는, 혹은 광장으로 가는 일은 특별하고 거시적인 일이 아니라 “초록색 마을 버스”나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를 볼 수 있는 평범한 일상 속에 함께 있게 된다. 이는 이념이나 관념으로서 투쟁을 위한 투쟁, 혁명을 위한 혁명이 아니라 생활 속 자율성의 질을 현재적으로 향상하는 일이 되고 그것은 “「장미공동체」”나 “생각보다 흰 급진적 목련”이라는 시적 어휘로 혁명 곁에 다가갈 수 있다. “장미공동체”와 “급진적 목련”은 정치와 예술이 결합된 새로운 어휘이자 예술로서도 정치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세계관이 된다. 이는 리처드 로티가 말한 ‘우리가 자유를 돌본다면 진리는 스스로를 도울 것이다’라는 명제를 실현하는 일이고 낡고 진부한 민주주의 개념을 새롭고 참신한 민주주의의 어휘로 전환시키는 창조적 행위가 된다.      


초록색 마을 버스가 지났고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있었고 미래가 도착했지만 생각은 생각만큼 진흥되지 않았고 유정도 무정도 인간의 일이어서 다시 토요일이 돌아오면 우리는 광장으로 갔다 그러는 사이 재벌도 고위 공무원도 감옥에 갔다 사랑을, 인간을 잃어야 한다면 나는 나를 중단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는 사이 가난한 우리가 아름다운 우리로 확장되었고 마침내 그것이 인용되었고 박진감 넘치는 불꽃축제가 광장의 어두운 밤하늘을 꽃무늬로 물들였다 유정도 무정도 인간의 일이어서 생활은 생각만큼 진흥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흰, 급진적 목련이 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흰」 전문-     

 

 「생각보다 흰」이라는 시에서 주체는 “미래가 도착했지만 생각은 생각만큼 진흥되지 않”고 또한 “생활도 생각만큼 진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시적 주체는 유토피아 정치학이 꿈꾸는 생각과 미래의 허망함을 쫓기보다는 일상 속에서 “사랑과 인간”을 잃지 않기 위해 토요일마다 축제를 즐기듯 “광장으로” 간다. 지금 여기, 일상의 공간에서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것을 자율적인 방식으로 행하고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하면 “가난한 우리”는 “아름다운 우리”로 확장된다. 그것이 곧 혁명 곁으로 가는 길의 구체적 과정이자 실체이고 우리는 그것을 항상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허구가 될지도 모르는 미래의 모습을 위해 늘 현재 원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지연시키고 희생시키는 체제의 유한성을 떠나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3. ‘나는 132번째다(#Yosoy132)’-무한 반복되는 재서술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신념과 행위,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인생을 설명하기 위한 각자의 어휘를 가지고 있다. 그 어휘들은 가족에 대한 사랑, 연인에 대한 그리움,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한 욕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 장래의 희망사항 등 인생의 다양한 통과의례들에 걸쳐 있는 언어들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희망과 기대, 때로는 불안한 감정을 가지고 앞을 내다보면서 혹은 그리움과 후회의 감정으로 지금껏 살아온 자신의 궤적을 뒤돌아보며 우리의 삶에 대해 서술해준다. 우리의 삶을 각자의 어휘로 서술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한에서만, 그 삶은 참이나 거짓이 된다. 삶이나 세계 자체는 도덕적이지도 비도덕적이지도 않다. 우리가 세계에 대응하는 합당한 방식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각자의 “의지나 느낌”이 살아있는 어휘로 세계에 대해 언어적 서술을 해야만 하고 이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 이렇게 했을 때 우리는 세계를 도덕적 혹은 비도덕적으로 만들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지만 침묵해서는 안되는”(「깊은 일」)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혁명 곁으로 가는 길”이 그렇듯 여기에는 어떤 객관적·주관적 규준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율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연성을 담고 있다. 

 이렇듯 서로 다른 입장에서 서로에 대해 자율적으로 서술하는 행위는 서로에 대해 그들 중 누구도 특권적인 입지에 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명료화한다. 다발적이고 동시적인 네트워크를 활용해 누군가에 대한 서술에 대한 재서술 그리고 인용과 재인용은 그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들을 특권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관점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도록 하고 이는 “혁명 곁으로 가는” 일이 된다. 이러한 방식과 태도는 “사업목적계약직 3년 무기계약직 5년 정규직 2년 꼬박 10년을 발등을 밟히며 얼굴이 뭉개지며 신들린 무녀처럼 정신없이 작두를 타듯 전철을 타던 그녀”, “누군가 끌고 다닌 그림자의 그림자만큼도 주장해 본적이 없는 그녀”(「무능력의 무능력」), “세상천지 어디 한 곳 압력을 행사할 데가 없는”(「독거」) 사람들, 그리고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죽느냐 개 같이 죽느냐의 문제”(「서푼짜리 오페라를 위한 시놉시스」)에 처한 이들이 권위나 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발언자나 서술자의 위치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기제가 된다. 누구나가 정보생산자, 리믹스하는 사람, 리트윗하는 사람이 되면서 그들은 현상의 우연성을 즐기면서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권위를 극복하고 권력자의 야망을 통하지 않고서도 권력을 뛰어넘는다.  

 2000년대 한국사회는 분명, “더 이상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는 흐르지도 멈추지도 않는 이상한 시간에 관한 이야기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는 이야기 미래라는 게 도대체 없는 이야기”(「취객」)만이 흘러넘치는 ‘문제없는 문제적 세계’이다. “미래라는게 도대체 없는 이야기”로 가득한 세계에서 안현미는 현상과 실재, 시간과 영원성, 언어와 비언어적인 것 사이의 간격을 무리하게 메우고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죽었는데 자꾸 출근하는 나”(「전신거울」)와 “정규직의 세계에서 지워진 나”(「무능력의 무능력」)는 거시적인 전망과 허상이 될지도 모르는 미래를 쫓지 않는 시적 태도를 견지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들은 무기력하지 않고 활력이 넘친다. “더 가난하고 더 무능력해지더라도” 일주일의 7일을 “일곱 개로 얼린 마음을 해동하기로”(「무능력의 무능력」) 결심한다. 세상에 발견해야 할 숨겨진 진리 따위는 없다는 것을, 어쩌면 슬픔과 그리움, 미움이 “다 호르몬이 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국수집에 와보니” 그동안 마음이 추웠던 이유는 “따뜻한 국수가 고팠”(「갱년기」)을 뿐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이 혁명은 불가능하지만 혁명 곁으로 가는 일은 가능한 시대를 버티는 힘이자 진리 자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안현미는 미래 대신 과거로 간다. 어쩌면, 이미 서술된 과거에 대한 재서술이 진리를 만들어 내는 창조적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스스로가 “나는 내가 자꾸 누군가 끌고 다닌 그림자이거나 나머지이거나 그 모든 것의 얼룩이거나 흔적 같았다”고 느낀다.      


나는 솔의 그림자로 마차의 그림자를 청소하는 마부의 그림자를 보았다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에서-     

우리는 어떤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가 그 터널을 뚫은 건 식민지시대의 사람들이라고 했다 언

젠가 너는 타임머신을 탈 수 있다면 어느 시대로 가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아무 곳도 가고 싶

은 곳이 없었으나 기대에 찬 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쓰고 있는 시대로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몇 세기인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부

언하자면 나는 내가 자꾸 누군가 끌고 다닌 그림자이거나 나머지이거나 그 모든 것의 얼룩이

거나 흔적 같았다 식민지시대의 사람이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언젠가 너는 타임머신을 탈 수 있다면 어느 시대로 가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정과 망치로 절망의 터널을 뚫는 사람들이 있는 시대로 가고 싶다고 했다 말의 그림자로 터널의 그림자를 뚫는 마래의 그림자를 보러가

자고 했다                                                         

                                                                 -「마래 터널」 전문-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르마조프가네의 형제들>에서 서술한 “나는 솔의 그림자로 마차의 그림자를 청소하는 마부의 그림자를 보았다”는 지옥을 보았다는 뜻이다. 안현미는 시 「마래 터널」에서 <카르마조프가네의 형제들>의 이 문장과 여수 마래터널을 엮어서 재 서술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서술로 1880년이라는 러시아와 1920년대 일제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공간은 ‘지옥’이라는 뜻을 지닌 어휘로써 새로운 그물망으로 짜인다. “정과 망치로 절망의 터널을 뚫는 사람들”이 있는, 참혹한 민중의 고통의 현장을 과거에 대한 재서술만으로 기존의 진부하고 낡은 언어인 ‘지옥’이라는 단어를 넘어선다. 이는 시적으로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새로운 어휘를 창출하게 되는 효과뿐 아니라 타자의 고통과 굴욕에 대한 민감도를 높이며 진정한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반복되는 재서술로 시간이 갈수록 날마다 길어지는 그물망은 “시간 약국 골목을 순례하며 수면제를 모으러 다니던 시간”을 버티던 “시간 양”과(「변신」),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 “지금 마흔아홉 개의 겨울을 오리고 있는 그”(「안녕, 곰」)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자아를 엮어가는 각자의 어휘들이자 흔적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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