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돼지우리>> 김엄지의 <<돼지우리>>
-김엄지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중
나는 휴직기간 동안 매주 월요일에 우쿠렐레를 배운 적이 있었다. 아파트 단지 도서관에 4명의 고정 멤버들이 2년여의 시간을 함께 했었다. 그들과 함께 할 때 나는 거의 세수도 하지 않고, 집에서 뒹굴다 잠바만 하나 걸치고 나갈 때가 많았다. 머리는 항상 부스스하고 눈동자는 멍한 상태다. 그들이 편해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꾸미는 것이 그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기도 하다. 그녀들은 우스갯소리로 나에게 말한다. 너 어디 가서 선생이라고 밝히지 말라고. 나는 그들의 유머가 섞인 갈굼을 쿨하게 받아들이며 ‘네버’라고 응답했다.
대학시절 과외로 돈을 버는데 익숙한 사람들은 나중에 일반적인 직장에 적응하기 쉽지 않다.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꽤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에 조직의 생리에 적응하고 고정된 월급을 받는 것보다 더 실속 있을 수도 있어서이다. 이런 세태에 대해서 어른들은 한탄하곤 하셨다. 어떤 세대에서는 규모가 있고 폼나는 조직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한강의 몽고반점을 읽으면서 몸 담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우리가 고상하다고 일컫는 의식이나 관념보다는 몸이 원하는 바, 혹은 몸 자체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는 것이다. 몸과 본능의 욕구를 희생해가면서 이룩해야 할 미지의 고상하고 숭고한 이데올로기 따위는 없다는 맥락과도 상통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돼지와 다를 바가 없다. 소설가 김엄지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채용 계약서'를 손에 쥐고 김엄지는 쓴다. "누구나 돼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돼지가 될 수는 없다" 우라라를 반색하며 채용 계약서 상 '갑', 고깃집 주인은 앞서 말했다. "라라양은 영혼이 돼지예요. 속일 수가 없어. 그래서 라라 양은 여기에서 일해야 해요. 그래야 라라 양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가 있거든. 라라 양은 내가 여태껏 만나왔던 돼지 인간들 중에서, 자기가 돼지인 줄 아는 유일한 돼지예요. 나는 라라 양을 보고 알았어요. 누구나 돼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돼지가 될 수는 없다는 걸." 대략 짐작이 되는 일급 반도체 회사에 취직해서 돼지우리에 갇히는 것보다 차라리 ‘돼지우리’라는 별 볼일 없는 삼겹살 구이 집에 취직해 먹고자 하는 욕망이라도 실컷 충족하겠다는 발상은 도발적이다. 세상에서 인정받는 일을 갖는 과정도 힘들지만 그것을 성취한다 해도 어차피 돼지우리에 갇힌 꼴이 된다면 과감히 스스로 돼지가 되어 돼지우리를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라라는 작가 김엄지의 분신이라 할 수 있겠다. 김엄지는 우라라고 우라라는 김엄지인데 정말 김엄지는 돼지가 되고 싶어 한다. 김엄지의 '직업윤리'는 돼지가 되는 일이고 그가 꿈꾸는 '자아실현'은 '돼지우리' 안에 갇히는 것이다. 김엄지는 백지 위를 달린 끝에 돼지가 된다. 그 전모다. 돼지가 됨으로써 우라라는 "그 개 같고 좆같은 떡"을 받아먹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라라 그녀가 말하는 직업윤리와 자아실현의 길을 성취할 수 있는 방식 또한 돼지가 되기이다.
돼지우리와도 같은 세상에서 그것을 감추고 포장하면서 허위의식을 지니며 남에게 맞추는 삶을 사느니 스스로 돼지임을 인정하고 돼지로서의 욕망에 충실하며 살겠다는 태도가 그녀가 미래를 대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에 대한 가치평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어쨌든 그녀의 방식이 현재의 누군가에는 공감이 되는, 세상의 진실을 말해주는 한 단면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