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 설여사 이야기
제주에서 돌아와 서러워 운 설여사
제주에서 아픈 발을 간신히 끌고 집으로 왔다. 오는 날 날씨가 좋고 오전엔 발이 안 아파서 걷기도 좋았다. 익숙해지는데 오는 거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남편에게 돌아왔다. 돌아온 나를 남편은 포옹까지 해주며 반겨주었다. 제주에서 못 먹은 제주오겹을 먹으러 집 앞 식당으로 갔다. 제주오겹 2인분을 시키고 참이슬과 테라로 소맥을 말아 시원하게 마시며 지리산에서의 서운함과 제주에서의 즐거움과 역경에 대해 남편에게 떠들었고 남편도 열심히 들어주었다. 이로서 내 일탈이 순조롭게 끝나는구나 생각했다. 한참 분위기가 좋았다.
남편에게 내가 제주에 갔는데 잘 도착했는지 왜 전화를 안 했냐고 하니 내가 가면서 전화도 문자도 하지 말라고 했단다. 난 말한 기억은 없지만 그랬을 것 같다. 집을 나설 때 엄청 비장했으니까. 그래서 무서워서 연락을 못했단다. 그럼 아이들을 시켜서라도 물어봐야 되는 것 아니냐고 하니 자기는 아이들에게 부모문제 때문에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단다. 헉~융통성이라고는 1도 없는 인간 같으니....
남편은 내가 제주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단다. 내가 가면서 제주 귤농장에 취직하면 안 올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진짜 그럴 것 같았단다. 내가 안 오면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했단다. 그래서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잘 못 잤단다. 3일을 걷고 온 나는 몸무게가 하나도 안 줄었는데 남편은 얼굴까지 핼쑥해져 있었다.
남편은 내가 떠나면 잡지 않을 거란다. 내가 선택한 걸 존중하고 흘러가는 대로 살 거란다.
남편의 말에 가슴이 무너졌다. 이 사람은 내가 집을 나가도 잡아주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 말이 나를 아프게 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내가 힘들 때 힘이 되지 못하겠구나. 내가 방황할 때 잡아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남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내가 흔들릴 때 본인은 더 힘들어하는 몸도 약하고 마음은 더 소심하고 약한 사람인 거다.
그때부터 입맛이 떨어지고 기분이 나빠졌다. 말없이 술만 먹는 나를 보며 남편이 순진하게 왜 말이 없냐고 물어본다. 말주변도 없고 눈치도 없는 남편이다. 서둘러 나머지 술을 해치우고 집으로 왔다.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서 외롭고 서러워서 소리 없이 한참을 울었다. 제주에서 돌아온 게 후회됐다. 발이 부르터 피가 나도 참고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한참을 울다 나와 열려있는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계속 서글픔에 침대에 누워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없다. 울다 금세 잠이 들었나 보다. 깨어보니 1시가 조금 넘었다. 남편이 내 머리에 손을 올리고 옆에 꼭 붙어서 자고 있다. 꼴 보기 싫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제주에서 오자마자 짐정리도 안 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가 들어와 씻고 바로 잠이 들었다. 쓸데없이 친절한 남편은 어느새 내 배낭의 짐들을 모두 꺼내 놓았다. 짐을 정리하고 비어있는 아들방으로 들어갔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어제 제주 서점에서 사 온 책을 읽으려 했는데 그것도 귀찮다. 아들 침대에 누워있다 잠이 들었다. 아침에 남편이 나가면서 내가 있는 방 문을 열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묻는다
"왜 여기서 잤어? 내가 코 골았어? 나 오전에 회사에서 교육이 있어서 교육받고 1시쯤 올게~ "하고는 남편은 회사를 갔다.
서글픔과 무기력함에 침대에 누워있다 문득 내가 갱년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나는 그동안 친구처럼 편하게 속마음 털어놓으며 지내는 쿨한 사이였다. 나는 남편이 나보다 더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다는 걸 안다. 말주변도 없고 눈치도 없지만 소박하고 순진하고 착한 사람이다. 나에게 나쁜 맘으로 어떤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닌 걸 아는데 갑자기 남편의 한마디 한마디가 왜 이렇게 심하게 서운한 걸까? 내가 이렇게 화가 나고 감정이 주체가 안 되는 게 이해가 안 됐다. 네이버에 갱년기증상을 검색해 보았다. '우울, 불안, 짜증, 예민함, 심한 감정기복, 정서적 불안감 등이 나타난다'라고 쓰여있다. 난 아직 완경도 아닌데 라며 찾아보니 감정변화부터 시작되는 갱년기도 있단다. 그러고 보니 여름부터 잘 때 등이 엄청 뜨거워서 깨서 거실로 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편에게 서운한 감정이 격하게 드는 건 갱년기 때문인 걸까? 정서적 불안감으로 남편이 이토록 미운 걸까?
나도 이제 갱년기가 시작된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심란했다.
남편에게 서운해도 점심은 해줘야 할 것 같아서 주방으로 가서 반찬을 하려고 무를 꺼내 썰었다. 엇! 칼이 잘 든다. 내가 일 년 동안 칼이 잘 안 들어 팔이 아프다고 갈아 달라고 몇 번 얘기해도 안 갈아주더니 나 없을 때 칼을 갈았나 보다.
회사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칼 갈았냐고 물으니 내 생각하며 칼을 갈았다고 한다. 어이고 무서운 사람이네. 전화해서 다독여줄 생각은 안 하고 나 집 나갔다고 칼을 갈다니. 내가 집 나가도 찾지 않을 거라더니 칼은 왜 갈았냐고, 칼 안 들면 집 나가야겠다고 하니 남편은 그저 웃는다.
순진무구한 남편 얼굴만 보면 나도 모르게 서운함이 밀려든다. 그 이후 남편이 내가 좋아하는 치킨을 사다 줘도, 나랑 같이 가고 싶다며 우이령길을 예약해서 단풍도 보여주고 오는 길에 내가 좋아하는 매운탕을 사줘도 매운탕은 맛있는데 남편에 대한 서운함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며칠이 지나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갱년기의 설여사를 어찌해야 하는지... 나도 갱년기가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