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오색지구에 새벽 도떼기시장이 열였다.
어둠이 짙게 깔린 깜깜한 밤중에 관광버스가 밀려들고, 먼저 도착한 버스에서 산객들이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보기 드문 진풍경이 펼쳐진다.
이런 모습은 단풍철 설악산, 지리산 등 몇몇 산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일 것이다.
산행 채비를 끝낸 사람들이 출입문 앞에 길게 줄지어 서 있다. 마치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처럼 비장하고 긴장된 표정이다.
우리 일행도 그 무리 속에 썩여 출발 총성이 울리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오색 탐방지구 등산로 입구드디어 출입문이 열리고 불빛 행열이 설악산으로 빨려 든다. 헤드랜턴 불빛이 어둠에 잠긴 설악산을 열어젖히는 순간이다. 모세의 길이 열리듯 수많은 불빛이 설악산을 파고들며 등산로를 밀고 올라간다.
좁은 출입구는 가래떡 뽑듯 헤드랜턴 불빛을 끝없이 밀어내고, 앞서 나간 불빛은 도깨비불처럼 어둠을 헤치며 앞으로 달아난다.
산객들은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서브쓰리(sub-3) 달성을 위해 죽기 살기로 뛰는 것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청봉을 향해 뛰다시피 움직인다.
해뜨기 전에 대청봉에 올라 해돋이를 볼 생각인지. 저마다 나름의 이유는 있겠지만 모두가 대단한 열정으로 길을 오르고 있다.
어둠을 뚫고 대청봉을 오르는 등산객들시간이 지나고 헤드랜턴 불빛 밀도는 낮아졌지만 대청봉으로 오르는 길 외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두둥실 떠 있는 밝은 달과 등산객들의 발소리로 하늘과 땅을 구분할 뿐이다.
1시간 정도 지났을 때쯤 계곡 물소리가 크게 들린다. 설악폭포가 여기쯤이라고 함께 온 일행이 이야기해 주지만 어둠 속이라 폭포를 볼 수 없다.
국내에서 난도 높은 코스로 소문난 곳이지만 산세를 눈으로 볼 수 없고, 허벅지 근육이 느끼는 정도와 앞뒤에서 들여오는 등산객들의 거친 숨소리로 정도를 가늠할 뿐이다.
가파른 경사가 2시간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피로가 몰려들며 다리에 힘이 점점 빠지고 있음이 느껴진다.
어둠이 어슴푸레 걷히고 있을 때 정상에 도착한다. 먼저 도착한 산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인증사진 찍으려는 인파가 30여 명 줄을 선 정상의 모습이다.
하늘에는 아직도 달이 떠 있고, 오색 방향과 한계령 방향으로는 길게 이어진 능선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한계령에서 중청대피소 방향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헤드랜턴 불빛이 반짝거린다.
저분들도 우리처럼 3시에 한계령을 출발하여 서북능선을 타고 이곳을 향해 열심히 오고 있는 있는 분들이다.
발걸음이 빠른 분들은 어느새 가까이 와 있지만, 더딘 분들은 아직도 저 멀리서 깜빡거리고 있다. 정상에 먼저 도착한 자로서 여유가 느껴지지만, 우리보다 더 먼 거리를 저리도 빨리 달려오는 그들이 대단해 보인다.
대청봉 인증을 위해 기다리는 등산객들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대청봉 정상석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는다. 그제야 배불리 먹은 뒤 포만감을 느끼는 것처럼 1708미터 고봉에 오른 성취감을 만끽한다.
이제 해돋이를 보기 위해 일출이 잘 보일만한 곳으로 옮겨 자리를 잡는다. 눈앞으로 보이는 동해바다 위로 검붉은 구름이 길게 이어져 있다. 해 뜨는 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구름 속에 숨어 나올 동 말동 애를 태우고 있다. 대청봉에 선 모든 등산객들이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해가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등줄기에 맺혔던 땀은 식은 지 오래됐고, 몸은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 갑자기 주변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동쪽 하늘을 보니 시커먼 구름이 알을 토해내듯 갑자기 해를 쑥 뱉어 내고 있다.
아 ~ 이게 대청봉 일출이구나!
정말 멋지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대청봉 일출이 아닌가. 첫 산행에 이런 행운까지 얻으며 대청봉에서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한다.
대청봉 일출
대청봉에서 바라본 외설악대청봉을 뒤로하고 짧은 내리막을 걸어 중청대피소 안으로 들어간다. 대피소 내부는 식사하는 사람들로 분주한 모습이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산중 아침을 먹는 모습에서 산행의 또 다른 재미가 엿보인다. 우리도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앉아 허기를 때우고 커피까지 한 잔 마시며 잠시 여유를 즐긴다.
대청봉에서 중청으로 이어지는 능선중청대피소를 나오니 들어갈 때와 달리 어느새 따스한 햇살이 반긴다. 쌀쌀했던 기운이 다소 누그러지고 따스함이 퍼지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안내판을 보며 내려갈 코스를 자세히 짚어본다.
화채봉에서 이어지는 화채능선, 삐쭉삐쭉 솟은 봉우리를 연결하며 힘차게 뻗은 공룡능선, 그리고 우리가 내려갈 천불동 계곡도 보인다.
아름다운 풍경화 속으로 들어가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아쉬움에 더 자세히 짚어 본다. 지나온 대청봉도 다시 한번 올려다보고 아쉬운 발길을 소청봉 방향으로 옮긴다.
소청봉으로 가는 길은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아직 쌓여있다. 가을 단풍은 이미 오래전에 지났고 겨울산의 모습을 보인다.
중청에서 흘러내린 능선을 따라 소청봉에 이른다.
내설악과 외설악 경치가 모두 보이는 곳이고, 봉정암을 지나 백담사로 내려가는 길과 희운각 대피소를 거쳐 천불동 계곡으로 갈 수 있는 갈림길이다.
서북능선을 따라 저 멀리 귀때기청봉이 보이고,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용아장성(龍牙長城)이 가까이 보인다. 비경을 자랑하는 용아장성은 최근 등반객 2명이 100m 절벽 아래로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곳이다.
환상적인 경치 뒤에 날카로운 용의 이빨을 숨긴 무시무시한 죽음의 능선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라보는 봉우리의 모습은 가 보고 싶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희운각으로 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이다. 등산로 옆으로 새빨간 열매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마가목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모습은 단연 돋보인다. 혹독한 날씨를 견디며 척박한 땅에서 맺은 이 빨간 열매는 귀한 약재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데 쓰일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한다.
실제로 동의보감에는 "풍증과 어혈을 낫게 하고 늙은이와 쇠약한 것을 보하고 성기능을 높이며, 허리와 다리 맥을 강하게 하고 뼈마디가 아리고 아픈 증상을 낫게 한다"라고 적혀 있다고 하니 보이는 모습처럼 귀한 열매임에 틀림없다.
마가목 열매고도가 낮아질수록 공룡능선과 천불동 계곡 바위능선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희운각 대피소는 증축 공사로 한창 분주하고, 주변에는 산객들이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도 계곡 한쪽에 자리를 잡고 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여유를 가진다. 계곡 위로는 대청봉이 까마득히 멀어 보인다.
다시 발길을 재촉하니 신선암과 천불동 계곡 방향으로 기암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공룡능선과 천불동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인 무너미고개에 이른다.
시간은 오전 9시 30분.
공룡능선을 타고 마등령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빠듯하다는 말에 망설임 없이 계곡으로 들어선다. 공룡능선은 다음 기회에 꼭 타겠다고 약속처럼 말해 보지만 언제 올 지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다.
천불동 계곡 바위능선
공룡능선 남쪽 끝자락 신선암천불동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아직 단풍이 남아있다. 빨갛게 물든 멋진 자태는 아니지만 봐줄 만한 모습이다. 계곡 좌우로 높이 치솟은 절벽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이나 갈 수 있을 듯한 가파르고 뾰족한 형상이다.
자연의 신비는 어디까지인가? 인간이 만들려고 노력해도 저런 모양은 절대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기암괴석이 마치 천 분의 부처님과 같다고 해서 천불동이라 불린다는 곳이 아닌가.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신선이 노닐던 곳"이라고 논할 만한 비경의 연속이다.
천불동 계곡 기암아래로 내려갈수록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린다. 투명한 물은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며 폭포와 소(沼)를 만들어 낸다. 천당에 온 것 같아서 천당폭포, 다섯 번 굽이치며 떨어지는 오련폭포, 양쪽에서 떨어지니 양폭. 감탄을 금치 못한다
아!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멀쩡한 인간도 이곳을 한 번 지나가면 멋진 경치에 혼이 빠져 정말로 신선이 되겠구나!
천불동 계곡 사이로 보이는 울산바위
천불동 계곡 하류
장군봉절경에 혼이 나간 무아지경(無我之境) 상태로 걷다 보니 어느새 비선대 앞에 이른다.
장군봉. 형제봉. 선녀봉의 세 봉유리가 하늘로 솟았고, 너른 바위 위로는 맑은 물이 넘쳐흐른다. 와선대에 누워 주변 경관을 감상하던 '마고'라는 신선이 이곳에서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비선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뚝 솟은 장군봉에는 까마득히 달라붙은 암벽등반 마니아들 모습이 보인다. 천 길 낭떠러지에 매달린 아찔한 저 모습도 비선대의 또 다른 풍경이다.
"로프에 매달려 간신히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한들 내려올 때는 또 어떻게 내려올라나...."
지난주에는 저 바위에서 암벽등반을 마치고 하강하던 등반가가 100m 아래로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는 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바위에 붙어있다.
내가 암벽등반을 모르긴 해도 바위 타는 것도 어떤 스포츠 못지않게 중독성이 꽤 강한 종목인 게 확실하다.
이렇듯 10월의 설악은 빨갛게 물든 단풍을 내세워 등산객들의 마음을 홀리지만, 사고도 많이 발생하는 시기다.
산 앞에서는 항상 겸손해야 하며, 얕잡아 보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출입금지 구역이나 비법정탐방로는 절대로 가지 않는 게 상책이다.
"산은 위험한 곳이니까...."
그러나 저 높은 곳에 매달려 천불동 계곡을 내려다보는 저들이 부럽다.
천불동 계곡 경치에 취해 피곤한 줄 모르고 정신없이 걸었더니 이제 발바닥에 불이 나기 시작한다.
신선놀음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종착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신흥사 일주문을 나서며 오색에서 설악동까지 무려 10시간이 넘는 긴 산행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오색에서 설악동까지 이동 경로
2021. 10.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