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같이하는 산꾼 셋이 모였다.
황태해장국 한 사발씩 후딱 해치우고, 전쟁터 나가는 병사처럼 비장한 각오로 악명 높은 두타산 정복에 나선다.
매표소 지나 베틀바위 방향으로 망설임 없이 돌진한다.
초반부터 가파른 언덕을 만나지만 곧 시원한 조망이 터진다. 삼화사 스님들이 참선을 했다는 삼공암이다.
한 숨 돌리고 베틀바위를 향해 또 진격한다.
코가 닿을 듯한 가파른 계단 올라 베틀바위 전망대에 이른다.
베틀바위아! 멋지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었던가?
여기가 한국의 장가계(張家界)로 소개되는 곳이다.
빼쪽하게 솟은 바위 군락이 기막힌 절경을 이루고 있다. 저 바위들은 어쩌다 저런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일까?
저것은 선녀가 하늘나라 질서를 어겨 인간세상으로 쫓겨나 비단을 짤 때 사용했던 전설 속 그 베틀이란다.
베틀바위 암벽경사도 심한 계단을 또 올라 베틀바위 뒤편으로 돌아가니, 장수처럼 우뚝 선 바위가 보인다. 옛 선인(先人)들 두타산 유람기마다 등장하는 바위다. 그 시절에는 길도 없고 특별한 등산 장비도 없었을 텐데,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게 참 신기한 일이다.
미륵바위 뒤로 하고 정상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가파른 언덕길 오르느라 반나절을 더 용쓰고, 땀에 절어 기진맥진 일보 직전에야 정상에 도착한다.
넙적한 돌판에 두타산을 소개한 글이 빼곡히 적혀 있고, 아래쪽에 구멍 뚫린 특색 있는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두타는 의식주에 대한 탐욕과 세상의 모든 번뇌 망상을 버리고 수행·정진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라고 적혀 있다. 산 이름에 담긴 의미대로 두타산은 수도하는 마음으로 올라야 한다. 왜냐하면 두타산은 너무 힘든 산이기 때문이다.
정상석과 일체 되어 인증사진 한 컷 찍으며, 고지를 정복한 쾌감을 잠시 맛본다.
두타산 정상석하산길은 올라올 때와 달리 능선을 타고 가는 오솔길로 들어선다. 인적이 드물고 험한 길이지만 붉은빛을 띤 아름드리 소나무가 눈에 띈다. 높은 곳에 있으니 누가 베어갈 수도 없고, 재선충만 잘 견디면 몇 백 년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은 멋진 소나무들이다.
고도가 낮아지고 마천루 가는 길로 접어드니, 계곡물에 발 담근 산객들과 사진 찍는 사람들로 산길이 잠시 혼잡하다.
천 길 낭떠러지로 미끄러지는 12 폭포 뒷 배경은 절경인데, 벼랑 끝에 선 한 등산객은 보는 이의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아찔해 보인다.
12 폭포 하단
전망 바위에서 무릉계곡 경치를 즐기는 등산객마천루로 통하는 길도 비경이 이어진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들이 놀고 갈 만한 풍광이 꽉 찼다.
산 옆구리를 따라 한참을 걸어 벼랑 끝에 놓인 마천루에 이른다. 쌓였던 피로가 싹 달아나는 듯한 시원한 조망이다. 박달계곡과 번쩍 바위, 용추폭포가 하늘 나는 새의 시선으로 보는 것처럼 계곡 전체가 훤희 내려다 보인다.
베틀바위가 웅장한 겉모습을 자랑했다면, 여기는 무릉계곡의 깊은 속살을 보여주는 곳이다.
마천루전망대 아래쪽으로 내려가니, 지난 6월에 개장한 금강바위길로 이어진다. 깎아지른 절벽을 가로질러 설치된 잔도(棧道) 데크길이다. 이 길이 열리기 전에는 접근조차 어려운 미지의 장소였으니, 두타산 유람기를 쓴 조선의 풍류객들도 미처 여기까지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잔도길 따라 아래로 내려오니 물소리가 크게 들린다.
이번에는 산객들이 몰려가는 쪽으로 따르니, 두 물줄기가 한 곳으로 쏟아지는 쌍폭포가 보인다.
두타산과 청옥산에서 내려오는 두 줄기 물이 만나는 곳이다. 서로 기싸움이라도 하는 듯 마주 보고 거칠게 물줄기를 퍼붓고 있다.
쌍폭포계곡 위로 조금 더 올라가니 용추폭포가 보인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거대한 바위가 물을 토해내고, 폭포 아래로 깊이조차 가늠할 수 없을 시커먼 소(沼)가 보인다. 용(龍)이라도 몇 마리 살고 있을 만한 음습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산이 높으니 골이 깊고, 골이 깊으니 물이 많아 웬만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을 것이다. 쌍폭포와 용추폭포를 보고, 두타산과 청옥산 크기를 다시 한번 실감한다. 이 거대한 폭포가 무릉계곡 시작점이고 반대로 끝나는 곳이다.
용추폭포폭포의 우렁찬 물소리 뒤로 하고 계곡을 따라 하염없이 또 걷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학소대(鶴巢臺)가 보인다. 그야말로 발길 닿는 곳마다 비경의 연속이다. 200여 년 전 무릉계곡에 은거하며 살았던 최윤상은 학소대를 보며 이렇게 노래했다.
맑고 시원한 곳에 배를 띄우니
학 떠난 지 이미 오래되어 대는 비었네
높은 데 올라 세상사 보라보니
가버린 자와 같아 슬픔을 견디나니
〈무릉정공 무릉구곡가〉
학소대계곡 끝자락에 이르러 왼쪽으로 삼화사가 보인다. 경내에 들어 한 바퀴 둘러본다. 1300년 된 고찰로 고려 때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저술한 사찰이다. 두타라는 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두타산은 불교문화와 인연이 많은 산이고, 그 중심에 삼화사가 있다.
사찰 앞 무릉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올라 서니 계곡 바닥을 가득 채운 허연 바위가 보인다. 무릉반석으로 불리는 곳이다. 가까이 다가오니 바위에 빽빽하게 새겨진 글자가 보인다. 비경을 읊은 시구와 이곳을 다녀 간 옛 선인들 이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좋다는 산과 계곡을 많이 다녀봤지만, 바위에 이렇게 많은 글귀를 새겨 놓은 모습은 처음 보는 광경이다. 그만큼 경치가 뛰어나고 많은 이들이 다녀갔다는 증거일 것이다. 무수한 명필가와 묵객(墨客)들이 이곳을 찾아 바위에 글씨를 남겼다.
상갓집 방명록에 이름 적는 것처럼, 다녀 갔다는 증표로 바위에 이름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 이 많은 사람 이름을 줄 맞춰서 바위에 새긴 것도 신기한 일이다. 뇌물 받은 사람들 이름 적은 취부책이라도 옮겨 적은 것은 아닐까?
무릉반석에 새겨진 수많은 글 중에서도 조선 4대 명필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양사언(1517~1584)의 글씨가 단연 돋보인다. 武陵仙源(무릉선원) 中臺泉石(중대천석) 頭陀洞天(두타동천)이라 적은 12글자는 예술에 가까운 솜씨를 보여준다. 한 자 한 자마다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필체에 힘이 넘친다. 어쩌면 양사언 선생보다 글자를 새긴 석공의 솜씨가 더 훌륭하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바위에 글자를 새기는 것은 자연을 훼손하는 위법행위지만, 이곳은 구경거리이자 관광상품으로 변했다.
이곳 어디쯤 허목 선생(1595~1682)이 쓴 문장도 한 줄 정도는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지만, 나로서는 모래밭에서 바늘 찾는 격이다. 그가 삼척부사로 재임하던 시절 이곳을 유람하고 쓴『두타 산기』가 옛 시인묵객들이 남긴 유람기들 중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무릉반석 상부
무릉반석 아래쪽허목은 그의 나이 66세 때 이곳을 유람하고 두타산기를 남겼다. 그 시절엔 환갑까지만 살아도 오래 살았다고 잔치를 열었을 판인데, 이 험한 곳을 돌아보셨다니 대단한 일이다.
하기야 그분은 '나이 오십에 능참봉'이란 그 당시 신조어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고, 조선 왕조 500년 사에 가장 늦게 관직에 나선 사람이라니 그럴 만도 하다.
그에 비하면 우린 아직 젊은이들인데 두타산 한 바퀴 유람하고 다리가 풀렸다. 더 좋은 경치가 있다 해도 이젠 더 걸을 힘도 없다.
2021.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