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국립공원 최고의 레인저 서이강과 신입 레인저 강현조가 산에서 일어나는 의문의 사고를 파헤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지리산'이 인기를 끌고 있다. 드라마에 매료되어 지리산 등산 계획을 잡았고, 이른 새벽 이곳 백무동에 도착한다.
백무동 정류장은 서울에서 도착한 버스와 배낭을 멘 등산객들로 분주하다. 어둠을 밝히는 불빛 외에는 사방을 분간할 수 없고, 처음 오는 곳처럼 낯설다. 함께 타고 온 등산객들도 모두 버스에 내려 등산 채비를 마치고, 산악대장을 따라 백무동 탐방지구로 이동하여 출입구를 통해 산으로 들어간다.
백무동 계곡을 따라 오르는 산객들의 헤드랜턴 불빛이 등산로를 훤하게 비추고 있지만, 등산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선보이는 수려한 경관도 상상해 보고, 알록달록한 단풍으로 보기 좋게 물 든 모습도 생각해 보지만 산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드라마 속에서 지리산은 이승과 저승 사이의 경계에 있는 산이고, 산을 떠도는 귀신도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산객들이 많아서 귀신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지리산에 서식하는 반달곰들도 불빛에 놀라 멀리 달아날 듯한 계곡의 분위기다.
백무동 등산로 입구계곡을 따라 장터목대피소까지는 이런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산행이 계속될 것이다. 빨리 올라가면 산장에서 아침을 먹으며 해가 뜨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동료의 말에 발길을 재촉한다.
헤드랜턴 불빛에 비치는 돌계단 위에는 낙엽이 많다. 나무에 붙어 있는 나뭇잎보다 바닥에 떨어진 단풍이 더 많을 것 같은 느낌이다. 어둠 속에 산을 오르니 지리산 백무동 만추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다. 낙엽과 시원한 새벽 공기 그리고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 전부이다.
어둠 속을 2시간 여 쉼 없이 오르니 산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며 산줄기가 선명해지고 앙상한 나무들이 보인다.
어둠이 완전히 물러갈 때쯤 장터목대피소에 이른다. 여기서 아침을 먹고 해 뜨는 모습까지 보고 갈 계획이었지만 구름이 끼어 있어 해를 보기에는 어려울 듯한 하늘이다.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 컵라면 먹을 물을 끓이고 아침 준비를 하는 사이에 한산하던 대피소는 밀려드는 산객들로 인해 곧 시끌벅적한 분위기로 바뀐다. 컵라면에 밥 한 숟갈 넣어서 김치와 같이 먹는 맛이 아주 꿀맛이다. 함께한 동료가 등산버너와 조리할 도구를 가지고 다니는 덕택에 맛볼 수 있는 산중의 진미다.
장터목대피소식사를 마치니 배낭이 한결 가벼워졌다. 가방 속에 있던 것들이 뱃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산행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등산에서 가장 무서운 적 중에 하나가 배낭의 무게라는 것이 또 한 번 생각나게 한다. 제석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잘 다듬어져 있다. 이미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산객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분들은 우리와 반대쪽 방향인 중산리에서 올라오신 분들이다. 돌계단 올라서니 조망이 시원하게 터지고, 저 멀리 반야봉으로 이어진 긴 능선과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언젠가는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저 능선을 타고 오는 지리산 종주를 시도해 볼 것이라 다짐을 해 보지만 곧 겨울이라 올해는 어려울 것 같다. 산을 좋아하는 산꾼이라면 누구나 '화대종주' 한 번 정도는 꿈꿔 볼 것이다.
제석봉으로 오르는 길 왼편으로 낮은 수풀로 덮인 완만한 경사지가 보인다. 갈대처럼 바짝 마른풀 속에 죽은 나무들이 삐쭉삐쭉 솟아있는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10만여 평의 비탈에 듬성듬성 서 있는 저 모습은 산객들의 시선을 끌며 특별한 자연경관으로 다가오는 곳이지만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곳도 구상나무, 전나무 등으로 울창한 숲이 우거진 곳이었으나, 도벌꾼들이 제재소까지 차려놓고 구상나무를 베어 내는 바람에 수난을 당했다. 그 일이 문제가 되자 도벌의 흔적을 없애려 불까지 질러 이런 모습으로 변했다고 한다.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부끄러운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제석봉 고사목 군락지제석봉 전망대에 올라서니 천왕봉이 가까이 보인다. 정상에 많은 인파가 길게 늘어선 모습이 여기서도 보인다. 저 사람들은 아마도 정상 인증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산객 들일 것이다. 추운 날씨에 저기에 줄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나보다도 함께한 동료가 더 걱정하는 모습이다. 그분은 인증할 필요가 없지만 내가 인증사진 찍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발아래로는 구상나무 군락이 보인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나무가 말라죽은 모습이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잘 알려진 구상나무는 해발 1000미터 이상 고산 지대에서 자라는 수종으로 지리산과 한라산 등 우리나라 남부지방에만 서식하는 수종이다.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어 구상나무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지만 산등성이가 허옇게 보일 정도로 죽어 가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다.
제석봉 남사면 구상나무 집단고사 지역
졔석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운무에 쌓인 제석봉 1915m 천왕봉에 이른다.
여기가 남쪽 반도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아! 황홀하다.
국내 최초의 국립공원이자 민족의 영산으로 여겨지는 지리산이 아닌가? 이 봉우리는 지리산에서 벌어지는 우리 역사의 비극과 희극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산의 크기만큼이나 사연도 많은 곳이다.
세찬 바람이 불어대지만 산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상석 앞뒤에서 인증사진 찍기에 분주한 모습이다.
높은 곳이라 정상 조망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거침이 없다. 날씨만 조금 더 쾌청하다면 더 멀리 볼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져보지만, 그렇게 까지 기대하는 것은 과한 욕심이다.
천왕봉 일출도 삼대가 등산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이다.
만족할 줄 알고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이제 그만 하산을 하자....
오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전하게 잘 하산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 아닌가?
천왕봉 정상석중산리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돌계단이 만만치 않다. 남쪽 사면이라 날씨가 따듯해진 게 그나마 다행이다.
올라오는 산객들로 등산로가 복잡하다. 시계를 보니 중산리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등산객들이 지금쯤 여기에 도착할 시간이다.
어제 저녁에 출발한 우리와는 달리 올라오는 산객들의 복장은 가벼워 보인다. 우리는 바위 아래 천왕샘 옆에 쪼그려 앉아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힘겹게 오르는 산객들을 구경하며 잠시 여유를 가진다.
젊은 남녀와 초등학생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다. 정상이 코앞이라 그런지 힘든 내색 없이 밝은 표정으로 열심히 오르고 있다.
한참을 내려와 법계사 경내로 들어선다. 해발 1450m에 위치한 사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절이다. 신라진흥왕 때 창건되었다고 하니 오랜 세월을 지리산과 함께한 사찰이다. 경내에 들어서니 포탄처럼 생긴 큰 쇳덩어리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일제강점기 지리산 혈맥을 끊기 위해 산에 박은 쇠말뚝을 제거한 것이라는 설명이 적혀있다.
뒤로 돌아 계단을 올라서니 사찰의 늦가을 모습과 건너편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조화를 이루며 한 폭의 풍경화 같은 멋스러움이 느껴진다.
법계사하산길은 지루한 돌계단이 끝없이 이어진다. 무릎에 부담은 느껴지지만 중산리 계곡의 단풍은 고도가 낮아질수록 화려함이 점점 더해간다.
단풍비가 흠뻑 내렸는지 바닥에도 낙엽이 수북이 널려있다. 비 온 뒤 질퍽한 빗길에 미끄러지듯 바닥에 떨어진 단풍을 밟고 뒤로 나자빠질 정도로 낙엽이 많이 깔려있다.
출발지 백무동 계곡에서는 캄캄한 어둠 속이라 볼 수 없었던 화려한 단풍 세상을 여기에서 만난다. 지리산 단풍은 피아골, 뱀사골 단풍을 최고로 친다지만 절정을 살짝 지난 이곳의 단풍 모습도 뒤지지 않아 보인다.
중산리 계곡 단풍오색으로 변한 단풍 구경으로 눈 호강하며 힘든 줄 모르고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종점 중산리 탐방안내소에 이른다.
탐방안내소에 들러 내부를 살펴보고 지리산에 대한 설명을 꼼꼼히 읽어본다. 평소 같으면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지만 드라마 덕분에 내부를 둘러보며 직원에게 이것저것 여쭤보기도 한다.
최근 '지리산' 드라마로 인해 국립공원 직원들의 인기가 많아졌다고 한다. 산을 지키며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 고생하시는 분들의 활약상을 늦게나마 알릴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전지현과 주지훈이 근무하는 '지리산 국립공원 해동분소'는 실제로 존재하는 곳은 아니지만, 지리산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을 바탕으로 제작된 실화에 가까운 드리마라고 한다.
오늘 저녁도 '지리산'이 기다려진다.
중산리 탐방안내소
2021.1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