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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보다 잿밥

조계산 산행기

by 하영일

조계산(曹溪山)은 천년고찰 송광사와 선암사를 품은 산이다. 오래전 수학여행 때 송광사를 다녀간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아주 오래된 일이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조계산 '보리밥'을 맛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입맛을 다신다.


산악회에서 내한 코스는 선암사를 출발해 장군봉을 찍고 보리밥집을 거쳐 송광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산지도에 '보리밥집'이 표시돼 있고, 맛집 프로그램에도 소개되었다니, 그 궁금증이 더 커진다.

산악대장님이 산행 코스를 설명하시면서 그 보리밥집에 대해서도 한 마디 보태니, 버스에 탑승한 등산객들도 보리밥집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눈치다.


몇 시간을 달려온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선암사 입구에서부터 등산을 시작한다. 낙엽 쌓인 널찍한 길을 20분 정도 걸었을 때 승선교(昇仙橋)가 눈에 들어온다. 개울을 가로지르는 아치형 돌다리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거친 급류에도 무너지지 않고 300여 년의 세월을 저렇게 견뎠다는 것이 신기하다.


여기도 꽤나 이름난 포토존인 듯, 지나는 사람 마다 다리 위에서 기념사진을 는다. 수없이 많은 산을 다니고 이름난 절을 구경했지만 사찰로 드는 길이 여기만큼 아름답고 운치 있는 곳은 못 본 것 같다.

승선교(昇仙橋)와 강선루(降仙樓)

이윽고 선암사 경내로 든다. 이곳은 수많은 사찰 중에서 정원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억지로 꾸미지 않은 아늑함 에 왕벚꽃나무, 홍매화 등 수려한 나무가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선암사 정원
선암사 대웅전

지금은 앙상한 모습이지만, 내년 봄이면 어김없이 황매화가 꽃망울을 활짝 트릴 것이다. 정원을 다 돌아볼 때쯤 독특한 모양의 건물 하나가 눈길을 끈다. 바로 2층 누각형 화장실 해우소(解憂所)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이 건물은 아직도 현장 체험이 가능한 살아있는 화장실이다.


남자는 좌측 여자는 우측으로 나뉘어 있으나, 보통의 화장실처럼 완벽하게 구분되어 있지않다. 갈대로 듬성듬성 엮은 발을 쳐서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가리고 있다.

선암사 대변소 내부

구멍 아래쪽을 내려다 보고 있자니, 화장실 치고는 깊어도 너무 깊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몇 날 며칠동안은 사람의 배설 흔적이 없어 보이는 똥덩어리 위로 퉁퉁하게 살이 올라 보통 쥐보다 두 배로 커 보이는 시커먼 쥐들이 이리저리 휘젓고 다닌다.

통시 구멍 아래로 보이는 이 모습을 보니, 그 옛날 수학여행 때 봤던, 엄청 깊은 변소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칸칸이 무판으로 구분되어 어, 쪼그리고 앉으면 옆사람과 서로 민망한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똥이 떨어지는 곳은 훤하게 트여있으니, 옆사람의 똥은 그대로 보이는 구조다.

이곳이야 말로 인간의 본성에 가장 충실하고 자연친화적인 곳이다. 선암사가 세계유산으로 선정되는 데는 '아마도 이 우소가 가장 큰 기여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벽면에 이런 시(詩)적혀 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선암사 해우소

해우소를 뒤로 하고 장군봉으로 향한다. 한줄기 땀을 흘리고 쉽게 정상을 정복하고 GPS 인증까지 마무리 한다.

정상 조망은 살펴볼 겨를도 없이 보리밥집 이정표에 시선이 꽂힌다. 또다시 발길을 재촉하여 이십여 분 지나 작은 굴목재에 이른다.

보리밥집 이정표
보리밥집

한참을 더 걸으니 장작 타는 냄새가 그윽하고 시끌벅적한 인기척이 느껴진다.

마당에 놓인 평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산객들과 주방 앞에 길게 줄을 선 모습이 보리밥집 인기를 실감 나게 한다. 우리도 얼른 줄을 서고 차례를 기다리니, 보리밥 두 그릇과 파전에 동동주까지 계산을 마치고 주문표를 받아 든다.


주방은 밀려드는 주문에 정신이 없어 보이고, 주인집 맏며느리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등에 아기를 업고 일을 하 계시다. 아기도 바쁜 것을 아는지 보채지 않고 얌전히 등에 업혀 있는 모습이 정겹고 서민적인 경이다. 우리가 어렸던 시절에는 흔한 광경이었지만, 요즘 세상에는 참 보기 드문 모습이다.


양은 쟁반 한가득 밥과 찬을 먼저 받고, 파전과 동동주는 주방 옆으로 돌아 따로 받는다. 평상 위에 펼쳐놓으니 보기에도 너무 푸짐한 밥상이다. 2만 8천 원짜리 밥상이 이리도 푸짐하구나. 그냥 먹어치우기에는 너무 아까워 남들에게 자랑이라도 할 요랑으로 사진부터 몇 장 찍어둔다.

보리밥 상차림

찌그러진 양푼이 바닥에 놓인 고추장 한 수푼과 윤기 흐르는 참기름이 특별한 모습이다. 양푼이를 코에 들이 대고 참기를 냄새를 맡아보니 고소한 향이 너무 진하다.


어릴 적 시골집에서 참깨 농사를 지었고, 지금도 시골 동네 기름집에서 직접 짠 참기름으로 시금치를 조물조물 무쳐서 먹는 걸 좋아하니, 참기름을 보면 냄새부터 맡아보는 버릇이 있다. 중국산이나 품질 나쁜 참기름은 냄새만 맡아도 금방 구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나오는 참기름은 잘 먹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과학적인 검사를 하기 전에는 원산지를 속단할 수 없지만 양푼이에 담긴 참기름은 향이 진하고 고소함이 코를 자극한다.

파전을 찍어먹는 간장종지에도 참깨가 많이 떠 있는 걸 보니, 이 집 사장님은 참깨에 대해서는 후한 인심을 가지고 계신 듯하다.


밥을 양푼이에 쏟아 넣고 나물을 얹어 쓱쓱 비빈다. 고추장에 완전히 비벼지기도 전에 밥숟갈이 입으로 들어간다. 몇 킬로미터 전부터 등산 이정표에 "보리밥집"이라고 써진 이유가 바로 이 맛이었던가 보다.

밥맛도 밥맛이지만 2시간 넘게 등산하고 허기진 배에 산속 풍경이 더해지니 밥 맛도 몇 곱절 좋아진다. 몇 숟갈 떠 넘기고 동동주까지 한 잔 쭈욱 들이키니 목줄기를 타고 넘는 시원함이 느껴진다.


캬 ~ 좋다. 조계산의 등산은 바로 이 맛이구나! 좋은 곳 구경하며 맛난 음식 먹는 것이 등산을 하며 느끼는 행복 중에 으뜸이지.... 한 그릇 뚝딱 비우고 가마솥에서 숭늉까지 한 사발 떠서 마신 후에야 산중 식사를 마무리한다.


~ 그런데 우리가 먹은 게 보리밥이 맞나? 정신없이 먹어치웠지만 먹은 게 보리밥이 아니었어....

그릇을 다 비워서 다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분명 흑미가 썩인 쌀밥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보리쌀은 없었던 거 같은데....


그렇구나!

조계산 보리밥집에는 보리밥이 없어.

허허허... 싫지 않은 미소가 입가로 번진다.


보리밥집 뒤로하고 고개 넘어 송광사로 발길을 옮긴다. 5시까지는 버스에 도착을 해야 하니 서둘러야 한다. 거리상으로는 선암사와 송광사 중간지점이니 아직도 꽤 긴 거리를 가야 하기 때문이다.


송광굴목재 지나 송광사까지 긴 내리막길이 이어고, 천년불심길 끝나고 송광사로 든다.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제일 큰 승보사찰(僧寶寺刹)며,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 등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어마어마한 사찰이다.

대웅보전

최근에는 '무소유' 라는 책을 저술하신 분으로 유명한 법정스님이 정진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침계루

계곡을 베고 누워있다는 침계루(枕溪樓)가 제일 먼저 보인다. 계곡의 암반 위에 설치된 기둥의 높낮이가 제각각 다르게 설치된 모습이 특별해 보이는 건축물이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으니 마음이 급해진다.


개울 위에 놓인 능허교를 지나 경내로 들어 대응보전, 승보전을 건성으로 휘익 둘러보고 망치듯 후다닥 빠져나온다.


오늘은 이렇게 보리밥 한 그릇 공양(供養)하고 년불심길 12Km를 다.


202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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