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바래봉은 백두대간 주능선에서 살짝 빗겨 나 운봉방향 서북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스님 밥그릇을 엎어 놓은 모양을 하고 있어 바래봉으로 불린다고 한다. 지리산의 많은 봉우리들 중에 높이로 치면 그리 주목받지 못하지만, 블랙야크 100대 명산 인증을 위해서는 천왕봉, 반야봉과 함께 꼭 올라야 하는 곳이다.
사실 바래봉은 우리나라 3대 철쭉 군락지로 잘 알려져 있다. 겨울 보다 철쭉 피는 봄이 더 아름답다고 한다.
철쭉으로 물든 바래봉 모습을 본 적 없지만, 축제가 열리고 많은 인파가 몰리는 것을 보면 꽤 볼만한 구경거리인 듯싶다.
겨울에는 바래봉 눈꽃축제가 열린다니, 철마다 다른 이름을 지닌 금강산처럼 바래봉에서도 계절 따라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요 며칠 사이 눈 내리고 시베리아급 추위까지 있었던 터라, 상고대와 은백색 설경을 기대했으나 눈이 보이지 않는다.
운봉학생수련원을 출발해 바래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하지만, 안내산악회 홈페이지에서 봤던 하얀 설경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바닥은 아이젠도 필요 없을 정도로 맨땅이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겨울산행 다운 감흥이 하나도 없다. 칼바람에 대비해 급하게 군고구마장수 모자도 하나 준비했는데.... 아 ~ 아쉽다!
해발 1000미터 이상 능선길에 올라서면 눈이 많이 있을까. 막연한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앞서 가는 산객들 뒤를 부지런히 따른다. 한 시간 여를 올라 부운치 능선길에 올라선다. 장쾌한 능선과 수많은 봉우리들이 보여야 할 곳인데, 잔뜩 찌푸린 날씨 탓에 조망이 없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정도는 아니지만, 바닥에 얇게 깔린 눈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바래봉으로 가는 길 옆으로 철쭉나무 군락이 군데군데 보인다. 분홍빛 꽃을 달고 있던가, 아니면 하얀 솜사탕 같은 눈이라도 뒤집어쓰고 있었으면 좋으련만, 이도 저도 아니라 볼품이 없다.
쉬었다 가기를 반복하며 한 시간 남짓 걸어서 바래봉 아래 삼거리에 이른다. 찬바람이 제법 세게 분다. 군밤장수 모자를 배낭에서 꺼내 쓴다. 아이젠도 꺼낼까. 고민도 해 보지만, 손이 시려 아이젠은 포기하고 스틱에 의지하여 조심스럽게 오른다.
능선 주변으로 나무가 적어 바람이 더 강하게 부는 구간이다. 예전에 양떼목장이 있던 곳이라 나무가 없다. 양들이 다른 수풀은 모두 뜯어먹었으나, 독성이 강한 철쭉은 먹지 않은 탓에 철쭉나무만 남았다고 한다.
봉우리로 오르는 길은 두툼한 모자를 눌러쓰고 완전무장 한 사람들로 분주하다.
에베레스트에 오르고도 남을만한 두터운 복장, 곰 모양의 패션모자를 쓴 산객,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짝 달라붙는 레깅스에 선글라스로 멋을 부린 젊은이, 각양각색 복장도 재미있다.
칼바람 맞으며 눈발 날리는 하늘을 보니 비로소 겨울산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겨울산은 이래서 좋다. 눈보라 몰아치고 살을 에는 찬바람이 얼굴을 때려야 겨울 산행인게지....
새찬 칼바람 뚫고 짧은 언덕길 올라서니, 바래봉 정상 데크에 이른다.
바래봉 인기에 비해 정상석은 너무 작고 아담하다. 줄을 서서 잠시 기다린 후 함께 온 회사 동료의 인증사진을 찍어 준다.
이번이 100대 명산 완등 산행이다. 시작한 지 2년 만에 우리나라 100대 명산을 모두 오르셨다.
좁은 땅덩어리긴 하나 엄청난 체력과 도전정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대단한 일을 해 낸 동료에게 큰 박수와 축하를 보낸다. 무엇보다 사고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기에 다행스럽다.
시작은 내가 빨랐으나 나는 이제 70번째 산행이다.
진행 속도가 늦어도 결코 아쉽지 않다. 산은 최단코스로 급하게 오르는 것이 아니라, 풍경을 음미하며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보며 천천히 오르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초콜릿을 숨겨 놓고, 하나씩 꺼내 먹으며 맛을 즐기는 것처럼, 산에 오고 싶을 때마다 봉우리 하나하나 천천히 정복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대한민국 명산 100좌 완등의 기쁨을 맛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바래봉 정상 능선길 2023. 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