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고성산으로 향한다.
특별한 설렘은 없지만, 언제나 나를 편안하게 받아 주는 둥지 같은 곳이다. 부족한 운동시간을 채우며 나만의 휴식을 즐기기엔 안성맞춤이다.
산행의 시작은 늘 창진휴게소 앞마당. 여름엔 시원한 그늘이, 오늘 같은 날은 커피숍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이곳을 지나는 오토바이 라이더들에게도 나그네의 주막처럼 잠시 쉬어 가는 장소로 이용된다.
창진휴게소휴게소 옆으로 난 오솔길 따라 산행이 시작된다. 걸음을 옮기자마자 이곳 특유의 기름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바로 옆 레미콘공장에서 새어 나오는 기름 냄새다. 벙커씨유와 아스팔트의 중간쯤 되는 향이다. 처음엔 고성산의 '옥에 티'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산행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처럼 익숙하다.
능선 따라 퍽퍽한 산길을 걸으니, 나무아래 자작하게 쌓인 눈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이 목덜미로 파고든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종종걸음 치니, 가파른 나무계단 앞에 이른다. 정상까지 가자면 두 번 의 가파른 언덕을 넘어야 하는데, 첫 번째 언덕이 바로 여기다. 발걸음마다 허벅지가 땡기고 숨이 가빠지는 구간이다.
단박에 계단을 올라서고, 정상을 향해 또 부지런히 걷는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마스크 안으로 입김이 차 올라 안경이 뿌옇게 흐려졌다. 콧등 위로 걸친 마스크를 가다듬으며 다시 발길을 재촉한다.
어느새 두 번째 언덕 앞에 이르고, 나무토막 의자에 걸터앉는다. 가방에서 생수 한 병 꺼내 마시며 계단 위로 시선을 올린다.
숨을 몰아쉬며 두 번째 언덕 올라서니, 어느새 등줄기에 땀이 맺혔다. 여기까지 올라오면 힘든 구간을 모두 지났고, 이제 시원한 경치만 남았다.
능선 끝자락으로 나아가니, 남쪽으로 안성평야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들판의 계절 변화를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비닐하우스 많은 소박한 시골 풍경이지만, 머지않아 도시로 개발될 것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들판 끝에 안성 시내 아파트들이 자리 잡고 있고, 그 뒤로 서운산 줄기가 놓여있다.
오른쪽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또 걷는다. 한번 더 내리막 오르막을 지나자 이내 정상 데크에 도착한다.
고성산 정상석을 가운데 두고 나무데크가 잘 만들어져 있다. 많은 사람이 동시에 쉬기에 충분하고, 망원경으로 주변 도시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
북쪽으로 동탄신도시 메타폴리스가 보이고 오산과 평택 삼성전자 공장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고성산 정상도시를 내려다보며 잠시 망중한을 즐기고 다시 하산길로 접어든다. 하산길은 따뜻한 배춧국에 밥 말아먹듯 쉬지 않고 단번에 후루룩 내달리니, 어느새 기름 냄새가 나는 곳에 도착한다.
기름 냄새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그윽한 커피 냄새를 따라 휴게소 안으로 든다.
커피숍에 들어서자마자 따스한 온기가 얼었던 몸을 사르르 녹이고, 커피에 빵 냄새가 어우러져 마음까지 푸근해진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잔 앞에 두고 식기를 기다리니 창밖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과 주차장을 가득 메운 차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비싼 커피 먹어도 배도 안 부른데 그걸 왜 먹느냐. 차라리 그 돈으로 라면을 한 그릇 사 먹지"라는 말에 공감했었지만, 어느새 나도 커피 한 잔으로 작은 행복을 즐기는 사람이 되어 있다. 나이가 들며 커피 한 잔이 가져다주는 소소한 행복을 알게 된 것 같다.
주차장 건너편 3.1 운동기념관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니, 그 옛날 이곳에 울려 퍼졌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들은 횃불과 몽둥이를 들고 원곡면사무소 앞에 모여 "조선 독립"을 외쳤다. 그 무리가 일천여 명에 이르렀다.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 놀란 일본 순사 끄나풀은 멀찍이 떨어져 동태를 살필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번뜩이는 횃불과 성난 함성으로 면사무소를 접수한 주민들은 이웃한 양성면으로 나아갈 것을 결의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양성면에는 일제의 통치기구들이 모여있고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네였으니, 이곳 주민들에게는 적개심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들의 발길이 이곳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몽둥이와 횃불을 치켜든 주민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일본인을 쫓아내고 곧 조선 독립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한 판 결전을 앞두고 군중들은 전열을 정비하며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각오를 다졌다.
그때 한 젊은이가 앞으로 나서 연설을 시작한다. 차분하지만 힘 있는 그의 목소리에서 죽기를 각오한 굳은 결의가 느껴졌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오늘 밤 기약함이 없이 이렇게 많은 군중이 집합하였음은 천운이다. 제군은 양성경찰관주재소로 가서 일본인 순사와 함께 조선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 순사가 이에 응하면 좋으나, 만약 응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로서도 할 바가 있다.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본의 정책을 시행하는 관청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원곡면, 양성면 내의 순사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서 등을 파괴할 것이다. 또한 일본인을 양성면 내에 거주케 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 일본인을 양성으로부터 물리쳐라. 제군들은 돌과 몽둥이를 지참하여 활발히 활동하라.
일장 연설이 끝나자 군중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날의 함성과 횃불이 식민지배를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하는 독립운동의 계기가 되었고 그 후로 이곳은 '만세고개'로 불리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만세고개는 이제 고성산 오르는 등산객과 할리데이비슨 라이더들의 편안한 쉼터로 변했다. 그때의 뜨거운 함성은 세월 속에 묻혔지만, 할리데이비슨 엔진소리와 아메리카노 커피 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겨우내 움츠렸던 라이더들이 가죽재킷과 가죽 부츠로 한껏 멋 부리며 그날의 군중들처럼 이곳에 다시 모일 것이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두두...
안성 3.1 운동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