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기 고향의 추억 9

by Branmaker 박중규

추억 9


모든 사람들이 그를 멸시하는 듯 대화를 한다. 해서 나는 그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사실대로 말을 했다. 조금 전에 내가 웃으면서 그랬지 사실은 서른 가마가 나온 거야 하고. 우리의 공출쪽지를 내어 보였다. 그러자 태방우는 그러면 그렇지 하고 웃었다.


이 해의 공출량은 어느 집 누구네 할 것 없이 다들 농사지은 전량을 다 가져다줘도 모자랄 양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누구 한 사람 앞에 나서서 그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 당시 우리 국민들은 왜놈들의 입에서 한 번 나온 말을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일 불응을 했다가는 살아남지를 못한다. 더군다나 중일전쟁(1937. 7. 7. 발발,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전면전 시작)을 시작한 일본 놈들인지라 식량만은 더더구나 엄했다.


조선 총독부에서 내려진 명령이다. 내가 굶어서 죽는 한이 있어도 그들의 명령은 어길 수가 없다. 해서 우리들은 농사지은 전량을 톡톡 털어다 가져다 바쳤다. 오히려 모자라는 사람이 많았다. 모자라는 사람들은 몸으로 공출을 마감한 셈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주제소로 불려 가서 많은 고문을 받은 뒤에서라야 해결이 된다는 그 말이다. 내 것 주고 매 맞는 세상.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같은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농사를 잘 지었다고 그렇게도 기뻐했는데, 우리들은 졸지에 거지 신세가 되었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나라를 잃기 전에 목숨부터 먼저 잃어야 할 터인데, 나라만 잃고 목숨만이 남게 되니 그럴 수밖에는 없는 일이다. 짓밟히며 개 취급을 당하면서도 그래도 죽지 못해 우리들은 초근목피로 목숨을 이어갔다.


남달리 입이 짧은 나는 그놈의 죽그릇을 보기만 하여도 이마에 주름살이 날 정도로 짜증이 났다. 노인네들도 아무런 말없이 죽으로만 연명을 하고 있는데, 내가 죽 탓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때만 되면 짜증이 났다.


농사를 잘못 지어서 그렇다면 말도 하지 않는다. 대풍을 만나 두 해 농사를 지어놓고도 그 모양이니 어찌 짜증이 아니 나겠는가 그 말이다.


해서 나는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집을 떠나기로 결심을 하였다. 때는 음력 시월 하순 낙엽이 한창 떨어질 무렵이다.


부산 땅에 가서 살고 있는 친구 수진씨의 주소를 알기 위하여 먼저 서동댁을 찾아갔다. 그 댁을 찾아가서 수진씨의 주소를 하나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의 모친은 수진씨의 주소를 분실했다고 했다. 해서 나는 되돌아 섰다. 아는 사람을 찾아가야 직장을 구할 텐데 하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나는 며칠 동안 고민을 했다. 어느 날 김경묵을 만났다. 나는 그에게 수진씨의 주소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알고 말고, 우리 형님을 찾아가면 금방 알 수가 있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다음 날 김경묵을 찾아가서 그의 형의 주소를 알았다.


그러고 나서 여비를 구해보았다. 하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 해서 나는 어른들이 몇 푼 감추어둔 돈을 훔쳤다. 그 돈은 부산까지 가는 차비도 채 못된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몇 푼을 더 구하여 가는 차비를 마련했다.


그런 뒤 나는 집을 떠났다. 넌덧골을 지나 갑령제 마루턱에 올라섰다. 구름도 쉬어간다는 삼십 리 대령 갑령제 마루턱에는 하마 벌써 백설이 만산하여 오가는 행인들의 발자취를 남기게 하였다. 그리고 한 겨울을 연상케 하리만큼 모진 바람이 휘몰아쳤다. 눈바람이 스칠 때마다 양 뺨이 터지는 것 같이 시렸다. 얄팍한 설경을 바라다보며 못안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발자국을 옮길 적마다 뽀드득 뽀드득하는 소리가 독행하는 나의 발길을 재촉이라도 하는 듯하였다.


못 안 골짜기에 들어서니 노송들이 하늘을 덮어 낮인데도 어두컴컴하다. 옛날에 그곳에는 호랑이가 우글거렸고 산적들이 득실거렸다는 무서운 외진 골통이라고 하였다. 이러함으로 대개의 행인들은 그곳을 꺼려했다. 나 역시도 무서운 기가 들었다. 그래서 뛰다시피 걸음을 빨리했다. 사람의 발소리에 놀란 꿩 떼들이 푸드덕 낄낄 방정을 떠는 통에 깜짝깜짝 놀랄 때도 없지 않았다.


화정골통을 내려빠져 봉림역(1938년의 봉림역은 현재 대구광역시 군위군 산성면 갑티로 79 (舊 봉림리 891-2번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 역은 중앙선 철도역이었으나, 현재는 폐역 되었습니다.)에 이르니 등허리에는 긴 땀이 흘러 축축하고 두 바짓가랑이는 흙탕물이 튀어 말이 아니다. 그것은 신발이 짚신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내 모습이 너무라도 초라하여 대합실 안으로 들어갈 용기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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