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2
이와 같은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유시적부터 초동목동이란 천덕꾸러기로 낙오가 되어 남들이 책보자기 들고 학교로 갈 때면 꼴망태를 둘러메고 산으로 들로 혹은 강변으로 다니면서 소꼴을 캐는 것이 나의 그 어린 시절의 일과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일가친척 하나 없는 고립된 가정에서 자라났기에 그 고독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호젓하였다.
천진난만하게 뛰어놀면서 학교 또는 서당에 다니면서 글이나 배워야 할 그 시절에 헐벗고 고독하게 사는 것만 하여도 서럽거늘 남들이 다 가는 학교에 가난 때문에 못 가는 그 서러움이란 어찌 말로써 다 표현하랴. 내가 여기서 천언만담을 한다고 할지라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참을 알 턱이 없다.
세상 서러운 것은 굶주림이요, 고독하게 살아보면 천하를 잃은 것처럼 허전하다. 사람이 없어보소. 그리고 고독하게 살아보소. 남에게 경멸을 당할 때는 땅을 치며 통곡이라도 하고 싶을 때가 얼마든지 있다. 못난 인간이라고 자책도 해 보았고, 타고난 팔자소관이라 생각하며 단념도 해보았지만,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풀어지지 않는 그 무엇이 뭉쳐져 있는 듯 어린 가슴에 철 못을 박는 듯 쓰리고 아팠다.
태산준령들이 만첩으로 둘러싸여 하늘만 보이는 오막골 산촌마을에서 남몰래 흘린 눈물 그 얼마였는지도 모른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살기 위하여 주야로 베틀에 올라가서 베를 짜는 어머님, 우리 식구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 개간에 전력을 다하는 우리 할아버님, 이 두 분의 희생이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내 나이가 열일곱 살이 되었다. 이제는 배워 보겠다던 욕망도, 알고파 하던 갈구도 모두가 다 하나의 꿈이요 추억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그간 보고 듣고 배워온 농사일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학교에 보내달라고 어른들에게 투정 아닌 투정도 무던히 많이 부려왔고, 그를 핑계로 게으름도 한없이 피웠다. 그러나, 이제는 그와 같은 시기조차도 죄다 지나가 버렸다. 타고난 팔자, 주어진 복,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랴. 허황된 꿈은 모두 다 버리고 내 격에 맞게 내 자질대로 살아가리라고 마음에 다짐을 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이상 어른들의 심려를 끼치지 않아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
앞에서 말한 바처럼 나는 그간 못 배웠다는 하나의 옹졸한 생각에서 우리 온 가족들의 속을 얼마나 많이 썩여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늦게나마 농사에 열중하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해 이른 봄부터 소를 몰고 산으로 올라가서 땔감도 실어오고 먼동이 틈과 동시에 일어나서 보리밭에 분전까지도 내손으로 다 하였다.
하지만 아직은 모든 일이 다 서투르다. 그중에서도 소를 다루는 일에서는 더욱 서툴다.
첫째, 힘도 부족하지만, 그 하는 요령을 알지 못하여 쩔쩔매곤 하였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일손을 늦추지 않고 열심히 이 일을 했다. 놀기만 하던 내가 별안간 부지런하게 일을 하게 되니 몸은 조금 피곤한 편이나 가족들의 눈치를 볼리가 없고, 마음부터가 홀가분하여 삶의 보람을 맛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 온 가족들도 저 애가 어쩐 일로 저럴까 하는 눈초리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듯하였다. 가족들의 시선이 내게 와 있음을 알자 나는 여간 기쁘지가 않았다.
음력 삼월달이 되었다. 음력 삼월달은 봄갈이를 할 적기이다. 그래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지게에 훌정(쟁기)을 담아지고 소를 몰고 들판으로 나갔다. 봄갈이를 해 볼 생각에서이다. 한 번도 못해 본 일이기는 하나 그래도 나 대로는 성숙한 편이라 자부심을 가지면서 힘 있게 소를 몰아갔다.
남들이 다 하는 일, 나라고 해서 못할 것이 무어람. 누구인들 어머님 뱃속에서부터 배워서 나왔을라고 하는 자신감, 또 한편 내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나 대신 할아버님이 그 일을 해야만 한다.
하기야 연세가 많았어도 그러한 큰 일에 대해서는 나보다가 열백배 낫겠지만 손주인 내가 있으면서 할아버님이 논갈이, 밭갈이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남의 눈을 위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다. 앞에서 수없이 말을 했지만, 나는 못 배웠다는 핑계 하나로 많은 불효를 끼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