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기 고향의 추억 1

by Branmaker 박중규

추억 1


내가 태어난 안태고향은 경상북도 대구 팔공산 북쪽 약 십 킬로 지점 군위군 고로면 화수동이라는 마을이다. 이곳 화수동은 나의 잔뼈가 굵어져 온 유일한 일념의 고향산천이요 많은 추억들이 담겨있는 오매불망의 향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로면 화수동이라고 하면 세상 아무도 모를 험준한 두메산골 마을이다. 연화봉 산기슭 서편 언덕바지에 초라하게 매달린 보잘것없는 이 작은 촌락은 정말 어디에도 비유할 곳 없는 오막골 산촌마을이다. 남으로 해발 일천 수백 미터(실제 1192m)가 되는 거대한 팔공산이 원격하여져 있고 동에는 연화봉, 서쪽에는 조림산(638m: 새림산이라고도 하며 鳥林山의 뜻), 북편에는 옥녀봉이 뾰족 솟아 그야말로 말 그대로 만첩산중이요 심산궁곡이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기암괴석들은 금강산 영봉을 방불케 하고 울창한 수림에는 낮에도 소쩍새와 부엉이가 울어대고 밤이 들면 야수들의 울음소리가 산속을 진동시킬 만큼 요란스럽다.


게다가, 마을 앞뒤로 하늘에 닿을 듯한 조림산과 연화봉이 바싹 다가붙어있어 넓은 하늘이 손바닥처럼 작게 보이는가 하면 아침해를 보려 하여도 반나절이 훨씬 넘어서라야 겨우 볼 수가 있을 정도이고, 점심 술을 놓기가 바쁘게 석양이 산을 넘고 황혼이 찾아든다.


내 고향의 흉이 아니라 참으로 기막힌 만첩산중이다. 이와 같은 깊은 산골인지라 들녘에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가 여간 심하지가 않다. 춘경을 할 시기 음역 삼월달에도 눈발이 날릴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해는 추곡이 결실도 하기 전에 찬서리가 내려 일 년 농사를 망치곤 한다.


그러나 주변 마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고로면 만이 그렇다. 이 고장 본토인인 김영(녕) 김씨네들의 자작 일촌들은 이 오막골 산촌마을을 세상 전부인양, 낙원의 별유천지인양 생각하고 누구 한 사람 낙오됨 없이 그 나름대로의 보람으로 느끼면서 만족하다는 듯이 살아갔다. 비록 첩첩산중 일지언정 이들 김씨네들은 그 고장에서 누대로 살았고,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산전박토일망정 많은 농토를 장만하여 몇몇 가정을 제외한 대개의 사람들은 의식주 해결은 물론 자녀들의 교육에 이르기까지 큰 어려움 없이 보란 듯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혹 누군가 “이 사람아 그와 같은 산골에서 살지 말고 좀 더 넓은 야지로 나가서 한 번 살아보지 그래”하고 권유를 해도 이들 김씨네들은 오히려 냉소를 띠웠다. 낙동강 지류인 고로천이 마을 주위로 맑게 감돌아 흘러내리고, 동리 앞에는 그런대로 작은 신작로가 하나 뚫어져 있으니 산골일망정 구애될 것이 무언가 하는 그러한 태도였다.


하기야 산수가 수려하고 수백 년을 살아와 깊은 정이 든 고향인 데다가 일가친척들이 즐비하게 살고 있으니까 이들 김씨네들로서는 낙원과도 같은 별유천지라고도 할 수가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들 김씨네들은 그 고장에서 수백 년을 살아왔고 또 그 장장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산전박토일망정 많은 농토를 장만하여 일 년 농사를 잘 짓게 되면 이년 또는 삼 년 식량도 될 수가 있었다. 만승천자(萬乘天子)라도 식의위대(食衣爲大)라고 하지를 않았던가.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살기 좋은 고장이고, 순우탕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의식이 자족하면 비록 태공이 아닐지라도 위수(渭水)를 바라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집안은 김씨네들의 삶과는 너무나도 판이했다. 왜냐하면 이곳 화수동은 내가 태어난 곳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원고향은 아니다. 우리 어른들의 고향은 동면 인곡동이라는 마을이다. 그 마을에는 우리 순천박가가 삼십여 호나 살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화수동보다도 더욱더 깊은 산골인지라 인구에 비해 지광(地廣)이 너무나도 협소하여 우리 일가들의 생계는 다들 말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중에서도 우리 집이 제일 가난하게 살았다고 증조할머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증조할아버님은 윗대 어른들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증조할아버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신 까닭에 가난을 면치 못했다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십수 년 후에 증조할머님은 열일곱 살 되는 할아버님을 장가들게 하였다. 그러니만큼 쪼달림은 점점 더하였다. 게다가 2년 후에 할아버님은 생남을 하였다. 이렇게 되다가 보니 설상가상으로 식구는 별안간 넷으로 늘어났고, 쪼달림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모자간에 의논을 하여 우리 아버님이 세 살 때에 고향을 떠나 이곳 화수동으로 이사를 한 것이다. 왜 하필 화수동을 택하였는가 하면 이 고장에는 증조할머님의 친정이 있었고, 또 할아버님의 자형 되는 분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다고 하였듯이 외가나 자형 되시는 분이 있다고 하여도 큰 부자가 아닌 이상 가난을 면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해서 할아버님은 고향에서 장만한 몇 량의 돈을 가지고 많은 생각 끝에 고로천변에 붙어있는 하천부지를 샀다. 지광은 꽤나 넓다. 그러나 그 하천 부지는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땅이다. 온통 자갈로 덮혀져 있는 땅이기도 해서 처음 그 땅을 살 때 화수동 사람들은 모두 할아버님을 가리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들이 자자하였다.


할아버님은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묵묵히 그 자갈더미 위에 엎드려서 개간에만 열중하셨다. 자갈이 땅의 거의 절반이다 보니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개간을 조금 하여 벼가 자랄 무렵이 되면 칠월 장마에 큰 물이 져서 일 년 동안 고생을 하여 지은 농사가 죄다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고 증조할머님은 말씀하셨다. 물막이 방천 둑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할아버님 혼자의 힘으로 완벽하게 방천 둑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을 사서 방천 둑을 만들 그러한 형편도 못되었다.


이렇다 보니 그 개간을 완수하기에는 부지 하세월이다. 그 개간을 처음 시작할 때 내 아버님의 연세가 세 살이라고 하였는데, 그분의 셋째 아들 내 나이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도 그 개간은 반밖에 되지를 않았다.


할아버님의 땀에 대가는 전혀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 삼십 년을 일을 했는데도 완전답은 여섯 마지기밖에 되지를 않았으니 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할아버님이 놀면서 일을 한 것도 아니다.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일을 하셨다. 하지만 원체 난공사이기 때문에 능률이 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에 난공사를 시작할 때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수천, 수만 명이 들어가야만 될 일을 단지 혼자 힘으로 하려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해를 많이 당하는 해에는 초근목피로 연명을 할 때가 많았다. 이와 같은 가정에 태어난 나는 유시적부터 초동목동이란 천덕꾸러기로 낙오가 되어 남들이 책보자기를 들고 학교로 갈 때 꼴망태를 둘러메고 산으로 들로 혹은 강변으로 쏘다니면서 소꼴을 베는 것이 나의 어린 시절 일과였다.



** 참고로, 아버님은 1923년 9월 5일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