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말자. 그러면 이상하게도 뭔가가 되더라.
물론 이 학생은 학기 초부터 의학적인 도움을 받고 있었다. 상담과 약물치료를 꾸준히 받았다고는 하지만 내 수업에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저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지라는 생각은 오히려 나와 그 아이의 관계를 망가뜨렸다. 심지어 나는 교사고 그 아이는 나의 학생이었다. 내가 그 학생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다른 학생들에게 간다.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었다. 피하면 안된다. 나는 그 공간, 그 순간의 최고의 주도권, 결정권, 그리고 의사권을 가지고 있는 교사이다. 교사가 피해버리면 쉽게 말해 그 교실, 그 시간, 그 공간은 무정부 상태가 된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마음을 온전히 나를 위해서 사용했기에 가능했다. 상대방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나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그 학생에게 무언가를 바라거나 혹은 내가 그 아이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나의 마음 가짐이 달라졌다.
아이를 포기하자.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교사가 이렇게 무책임하게 아이를 내버려 둘 수가 있겠냐 라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생각하는 그런 포기가 아니다. 아이를 무책임하게 내버려두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회피이고 아예 피해버리는 것이다. 명백하게 말하자면 그 아이가 바뀌어지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 이후 나는 그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거진 처음 그 아이를 나의 교실로 불렀다. 아이가 나의 교실 문을 열고 딱 내가 그 4학년 학생을 봤을 때 하나 깨달음이 왔다. 그 아이는 나와 다시 또 감정적인 싸움을 하러 왔다. 싸울 준비를 단단히 하고 나에게 지지 않고 본인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러 왔다. 아이의 눈을 봤을 때 단 번에 알 수가 있었다.
이미 그 아이와 나의 관계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아니라 앙숙의 관계, 개와 닭의 관계, 증오만 남아있는 관계가 되어 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아이는 나에게 혼나는 상황을 경계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맞받아치고 나에게 욕을 하고 반말을 하고 소리를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만 바꾸고 단 하나의 포기만 했을 뿐인데 그 아이의 심정과 마음이 보였다. 내가 그저 나의 욕심과 나의 감정만을 바라보았기에 저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보질 못했다.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한 두려움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딱 한마디 했다.
00아, 마이쮸 먹을래?
그러자 그 아이의 눈에서 싸울준비를 하고자 하는 눈이 살짝 풀렸다. 본인은 먹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에 대한 경계를 계속 하고 있었다. 뒤이서 나는 딱 한마디를 덧 붙였다.
00아, 오늘은 수업 중에 소리 덜 지른 거 같은데? 웃으면서 그 아이를 보면서 말했다. 진짜 진심이었다. 학생을 칭찬하거나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날 저 아이는 평소보다는 덜 폭력적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 아이가 말한 것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쌤, 저 소리 안질렀는데요?
그 아이는 그 순간에도 거짓말을 하는 아이였다. 저 대답을 듣고 서로 굉장히 크게 웃었다. 왜 웃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서로 그 순간이 되게 웃겼다. 아마 본인이 말했는데도 너무 뻔한 거짓말이라 생각했는지 혹은 내가 웃으니까 따라 웃은 것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이 아이는 진짜 이런 아이구나라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인 순간이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라는 것을 할 수가 있었다.
화가 나거나 혹은 친구를 때리고 싶거나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무시받거나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거나 할 때는 참을 수 없는 화가 나고 친구들이 본인 옆이나 앞에 있으면 때리고 싶고 어깨로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고 했다. 이러한 대화를 우리는 처음 한 것이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더 이 아이는 내가 바꾸지 못하겠구나 딱 그 생각이 단단하게 굳어져 갔다. 일방적으로 어떤 잘못을 했는지 말해주고 이렇게 하면 다른 친구들이 기분 나빠 할거야 이러한 화법은 이 아이에게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물어봤다. 화가나고 친구를 때리고 싶은 충동이 들면 어떻게 할 건지. 그 아이도 그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다만 잘못된 것을 아는 것과 그 행동을 함으로서 느끼는 죄책감은 다르다.
그 아이는 그 행동이 잘못된 것을 알지만 그 행동을 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죄책감은 제로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안위를 위해 그 아이와 딱 하나의 약속을 했다. 화가나고 누군가를 때리고 선생님에게 욕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으면 혼자만의 공간에서 잠시 있다가 오기로 했다. 그리고 그 아이도 그 부분에 수긍을 했다.
그렇게 다시 수업을 했을 때 나의 마음은 한결 더 편해졌다. 상황이 바뀐 것은 없었다. 또 똑같이 소리를 지르고 폭력적이고 화를 내는 상황이 내 수업에서 일어났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기서 혼자 좀 시간을 보내고 올까? 나는 이전 처럼 화를 내지도, 감정적으로 무너지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물론 바로 약속된 장소로 가서 혼자서 시간을 보내거나 하진 않았다. 혼자만의 공간으로 가거나 잠시 떨어져셔 시간을 보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럴 때 마다 내가 또 혼을 내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진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아이의 행동에 대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저 아이는 저런 아이니까. 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니 막 예전 처럼 분노가 치솟거나 내가 감정적으로 무너지진 않았다. 나중에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약속된 장소로 같이 가면서
이런 또 화가 났구나~ 화가 풀릴 때까지 있다가 다 풀리면 나와~ 이런식으로 대응을 했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 본인이 먼저 말했다. 아직도 기억이 또렷하다.
선생님 저 좀 혼자만 있다가 진정되면 나올게요. 화가 너무나서요. 나의 공간, 나의 시간, 나의 수업에서 이 아이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포기를 하니 오히려 변화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