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전과 투자 후...
창업을 하기 전에 나는 회사를 꽤 많이 옮겨 다녔다. 바이오벤처에서 시작해서 제약사, 다시 벤처, 상장 바이오벤처, 대기업 등등 아마 근무기간으로 따지면 3~4년이 항상 고비였던 것 같다. 사업개발에서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고 더 이상 마땅히 할 일이 없거나, 업무가 루틴해지면서 지겨워 지거나, 아무리 열심히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좌절하거나 등등 언제나 이유는 있는 법이었다. 이렇게 직접 경험한 덕분에 현재 회사에서도 임직원들의 번아웃을 경계하고,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프로그램을 항상 고민하고 있다.
어쨌든 다녔던 회사들 중에서 대기업에서 흥미로웠던 경험이 있었다. 바이오나 제약업체가 아닌 전혀 다른 분야의 대기업이었지만 바이오를 신사업으로 규정하고 이를 위해 인수하거나 협력해야 할 업체들을 두루 물색하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 중 한 업체의 대표님과 처음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나서, 이후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호감을 쭉 표시하셨고 지금까지도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나중에 왜 그렇게 저를 좋아하셨나 여쭤봤는데, 그분 대답은 대기업 팀장들, 심지어 실무 매니저들과도 많이 만나보고 협력논의도 했지만 그들의 몸에 배어 있는 "갑"의 느낌 때문에 무척이나 불편했었는데, 벤처 출신인 나에게서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어서였다는 대답을 주셨다.
투자 유치를 시작하면서 기관투자자들과 만나 보면서 이런 갑을 관계를 은근히 생각하고 경계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봐왔다. 사실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투자를 집행하는 권한은 전적으로 기관투자자의 몫이므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투자 조건을 협상하면서 이를 의식해서 기관투자자가 제시한 조건들을 가감없이 받아 들이는 등 회사에서 협상을 아예 포기할 필요도 없다. 예를 들어 기관투자자가 실적에 대한 리픽싱 조항을 요구할 경우 그에 따라 오히려 회사의 연구개발 전략에 차질을 빚거나 무리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면 합리적 근거를 대면서 다시 협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스톡옵션 부여 권한에 대해서도 무조건 기관투자자의 동의를 받도록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일정 pot을 할당해서 이를 회사가 통보하는 것만으로 신속하게 부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충분히 얘기해볼 만하다.
정작 더 중요한 문제는 기관투자자가 투자를 하고 나서 회사와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기관투자자는 회사의 주요 주주로서 당연히 한배를 타게 되고 기꺼이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든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는 제약사의 연구원 출신, 혹은 사업개발 출신들도 많이 포진해 있어서 국내외 제약사와의 공동연구, 파트너링 기회도 활발히 소개시켜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기관투자자의 선의와 역량을 잘 받아들이고, 회사 내 연구개발 데이터나 사업개발 현황에 대해 아주 민감하지 않은 것이라면 최대한 공개를 하고 이들의 의견을 받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투자사에 근무할 당시 한 바이오벤처는 기관주주간담회를 분기별로 개최하면서 발표자료에 회사의 경영, 연구개발 데이터, 사업, 자금현황 등을 상세히 정리해 보여주면서 굳이 추가로 뭔가를 요청할 필요가 없을 정도까지 배려해주었다. 그걸 기억하면서 우리 회사도 동일한 양식으로 간담회 자료를 배포하고 기관투자자의 적극적인 도움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회사와 기관투자자의 최종 목적은 비록 다르더라도, 최소한 중간 기착지는 동일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활발하게 기관투자자와 교류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들은 기꺼이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고, 왠만한 컨설팅 기관보다 역량이 훨씬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