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에서 배우는 국가R&D의 역설
어느 날, 책장에서 『미움받을 용기』를 다시 꺼내 들었다.
몇 년 전 읽었을 때는 대인관계의 고민을 풀어주는 심리학 책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국가연구개발사업의 기획서를 검토하고, 평가회의에 참석하고, 연구자들의 고민을 듣는 일상 속에서, 이 책의 메시지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아들러의 말. 그렇다면 연구자들의 고민도 결국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평가자와의 관계, 동료 연구자와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시스템과의 관계.
기획서 검토 회의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늘 비슷하다.
"이 기술의 성공 가능성은?"
"TRL(기술성숙도) 몇 단계까지 도달 가능한가?"
"핵심성과지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정했나?"
연구자들은 대답한다. 놀라울 정도로 확신에 찬 목소리로.
"99% 성공 가능합니다."
"3년 내 상용화 가능합니다."
"예상 시장규모는 10조 원입니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묻는다. 정말일까? 아니, 정말 그렇게 확신하는 걸까?
아니다. 그들도 안다. 연구란 본질적으로 불확실한 것임을. 하지만 "실패 가능성 50%입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순간, 그 과제는 탈락한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공모(共謀)한다. 성공이 확실한 척하는 거대한 연극에.
『미움받을 용기』는 말한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은 타인의 과제이지 나의 과제가 아니다."
하지만 국가R&D 생태계에서 연구자는 이 말을 실천할 수 없다. 왜냐하면 '타인의 평가'가 곧 다음 과제의 선정 여부를 결정하고, 연구비 규모를 좌우하고, 경력의 경로를 그리기 때문이다.
실패한 연구자에게는 낙인이 찍힌다.
"저번 과제 제대로 못했는데..."
"이번엔 괜찮을까?"
그래서 연구자들은 안전한 연구를 선택한다. 이미 70% 검증된 기술, 논문으로 이미 발표된 방법론, 확실하게 성과지표를 달성할 수 있는 계획. 혁신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안전한, 점진적 개선.
진짜 혁신은? 그것은 위험하니까 다른 누군가의 몫이 되어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들은 실패에서 탄생했다.
알렉산더 플레밍은 실험실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실수' 덕분에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3M의 연구원은 강력한 접착제 개발에 '실패'했지만, 그 결과물이 포스트잇이 되었다. 전파망원경은 원래 통신 잡음을 제거하려다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했다.
SpaceX를 보라. 팔콘 로켓은 몇 번이나 폭발했나? 일론 머스크는 실패 영상을 공개하며 말했다. "실패는 옵션이 아니다. 실패는 필수다(Failure is not an option. Failure is required)."
그렇다. 진짜 혁신은 실패를 전제로 한다. 실패 없는 연구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의 재확인일 뿐이다.
『미움받을 용기』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과제의 분리'다.
내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명확히 구분하고,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도 않고, 타인이 내 과제에 개입하도록 허용하지도 않는 것.
국가R&D 시스템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연구자의 과제: 정직하게 도전하고, 실패에서 배우고, 진정한 가치를 창출하는 것
평가자의 과제: 결과가 아닌 과정의 진정성을 평가하고,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인정하는 것
제도의 과제: 실패를 처벌이 아닌 학습의 기회로 만드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하지만 현실은 이 과제들이 뒤엉켜 있다. 연구자는 평가자의 눈치를 보고, 평가자는 결과 중심의 제도 속에서 과정을 무시하며, 제도는 실패를 통계상의 손실로만 계산한다.
내가 늘 강조하는 것이 있다.
국가R&D는 'Plan Driven'에서 'Value Driven'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Plan Driven은 묻는다. "계획대로 했는가?"
Value Driven은 묻는다. "가치를 창출했는가?"
계획대로 진행했지만 아무 의미 없는 결과물을 낸 연구와, 계획을 여러 번 방향 전환했지만 예상치 못한 혁신을 이룬 연구.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가?
Agile 방법론이 소프트웨어 개발에 혁명을 가져온 이유는 명확하다. "실패를 빨리, 자주, 값싸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짧은 반복 주기마다 피드백을 받고, 방향을 수정하고, 작은 실패들을 통해 큰 실패를 방지한다.
국가R&D도 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 3년짜리 과제를 일 년 단위로 쪼개어, 매년 진정한 피드백을 받고, 필요하면 방향을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실패했다면 그 실패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변화의 싹은 보인다. 작지만 분명하게.
일부 과제에서는 '학습 성과'를 성과지표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실패한 실험이라도, 그것이 다음 연구에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했다면 가치로 평가하는 것이다.
일부 평가위원회는 "왜 실패했는가?"보다 "실패에서 무엇을 배웠는가?"를 묻기 시작했다.
일부 연구기관은 '실패 사례 공유회'를 열어, 실패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학습 자산으로 만들고 있다.
AI 시대, 기술 패권 경쟁, 기후위기, 팬데믹...
우리는 전례 없는 도전 앞에 서 있다. 이런 시대에 안전한 연구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신이고, 혁신은 실패를 전제로 한다.
『미움받을 용기』가 개인에게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말한다면, 나는 국가R&D 생태계에 말하고 싶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실패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그 용기가 진짜 혁신을 만든다."
물론 쉽지 않다. 평가표의 체크박스를 바꾸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 연구자의 마인드셋, 평가자의 관점, 제도의 철학, 사회의 인식까지 모두 변화해야 한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으니까.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으니까.
오늘도 나는 기획서를 검토하며 묻는다.
"이 연구는 실패할 수 있나요?"
그 질문에 "네, 50% 확률로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하면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배울 겁니다"라고 당당히 대답하는 날이 오기를.
그날, 우리는 비로소 진짜 혁신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