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가 필요한 시점
겨울 아침, 커피를 마시며 유튜브를 훑어보다가 눈을 의심했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자동차 안전도 평가 결과였다. 테슬라 모델 3가 4등급, 포드 익스플로러가 5등급이라니.
같은 차가 유럽과 미국에서는 최고 등급을 받았는데 말이다.
호기심에 세부 내역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커피를 뿜을 뻔했다. 테슬라가 차로 유지 기능에서 0점을 받았다고? FSD로 "차가 혼자 알아서 운전한다"며 화제가 되는 그 테슬라가?
이유를 알고 나서는 웃음이 나왔다. 아니, 씁쓸한 웃음이었다.
시속 60km로 달리다가 커브를 만났을 때, 테슬라는 안전을 위해 자동으로 속도를 줄인다. 인간 운전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행동이다. 운전면허 학원에서도, 도로 위 표지판도, 심지어 우리 부모님도 늘 말씀하신다. "커브에서는 속도 줄여라."
그런데 우리나라 평가 기준은 다르단다. 커브에서 속도를 줄이면 감점. 그대로 60km를 유지하며 돌아야 만점이란다.
나는 잠시 상상해봤다.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커브를 만난 수험생이 감속하지 않고 그대로 돌진한다면? 아마 감독관이 급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불합격!"을 외칠 것이다. 그런데 자동차의 안전 기능 평가에서는 이게 정답이라니.
이런 평가 방식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 더 놀라웠다. 이미 수년 전부터 같은 문제가 지적되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왜일까?
혹자는 '자국 산업 보호'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현대기아차는 이제 세계 3위 자동차 회사다. 테슬라보다 많이 팔고, 포드보다 많이 판다. 아이오닉 5는 유럽 올해의 차에 선정됐고, 제네시스는 럭셔리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이런 회사를 아직도 보호해야 한다고?
1990년대, 우리 자동차가 '싸구려'라는 이미지를 벗어나려 발버둥 칠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다르다.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당당히 경쟁해야 할 어른이 된 것이다.
며칠 전, 테슬라 FSD가 한국에 정식 출시되었다. SNS는 그 놀라운 기능에 대한 후기로 가득했다. "진짜 사람보다 잘 운전한다", "미래가 왔다" 같은 감탄사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평가 체계는 이런 미래 기술을 제대로 평가조차 못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감점을 주고 있다.
이게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소비자를 위한 것? 아니다. 왜곡된 정보는 오히려 소비자의 올바른 선택을 방해한다.
우리 기업을 위한 것? 그것도 아니다. 온실 속 화초는 거친 바람을 견디지 못한다.
문득 K-pop이 떠올랐다. BTS가 빌보드를 점령하고, 블랙핑크가 코첼라 무대에 서는 시대. 그들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내에서만 통하는 기준이 아니라, 세계적 기준으로 경쟁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 기준을 뛰어넘어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손흥민이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 리그에서만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인정받는 선수가 되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만의 리그에서 1등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진짜 경쟁은 글로벌 무대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 무대에서 이기려면, 먼저 정직하고 공정한 평가부터 시작해야 한다.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현대 넥쏘가 유로 NCAP에서 최고 등급을 받은 것이다.
수소차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가진 사람들이 아직 많다. "충돌하면 수소탱크가 터지는 거 아냐?" 같은 우려 말이다. 하지만 넥쏘는 정면충돌, 측면충돌 모든 테스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90% 이상 충전된 상태에서도 안전했다.
이것이 진짜 성과다. 글로벌 기준으로, 공정한 평가를 통해 인정받은 성과.
우리는 더 잘할 수 있다. 아니, 더 잘해야 한다.
커브에서 속도를 줄이는 것이 감점이 되는 평가 체계. 전 세계가 인정하는 안전 기능을 0점 처리하는 기준. 이런 것들을 하나씩 바꿔나가야 한다.
그것이 진짜 우리 자동차 산업을 위하는 길이고, 소비자를 위하는 길이며, 무엇보다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글로벌 시대다. 정보는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비교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만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1등"이라고 자축해봤자, 세계는 알아주지 않는다.
오늘도 도로 위에는 수많은 차들이 달린다. 그중에는 커브에서 알아서 속도를 줄이는 똑똑한 차도 있고, 그렇지 않은 차도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더 안전한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전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다.
창피한 일이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바꿀 수 있다. 바꿔야 한다.
언제쯤 우리는 커브에서 속도를 줄인 것이 '올바른 안전 기능'으로 인정받는 날이 올까.
그날이 오기를,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조용히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