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서 벗어나는 법

R&D 전략가가 발견한 혁신의 조건

국가연구개발사업 평가위원회 회의실. 열 명 남짓한 전문가들이 둘러앉아 한 연구팀의 제안서를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제안서는 기존과 다른 접근법을 담고 있었지만, 회의실 분위기는 냉랭했습니다.

"이전 유사 과제에서 실패 사례가 있었습니다."

"검증된 방법론이 아닌데 위험 부담이 큽니다."

"우리 분야에서는 통상 이런 방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R&D 전략 기획과 평가 업무를 하면서 수없이 목격한 장면입니다. 혁신을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우리는 기존의 틀 안에서 안전한 답을 찾으려 합니다.

왜 그럴까요? 최근 뇌과학과 동양철학을 접목한 한 영상을 보고 그 답을 찾았습니다.


뇌가 만드는 가장 강력한 패턴

뇌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 뇌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패턴을 찾습니다. 복잡한 세상을 단순화하고, 예측 가능한 규칙으로 정리하려 하죠. 심지어 없는 패턴까지 만들어냅니다. 로르샤흐의 잉크 반점 검사처럼, 무작위한 얼룩에서도 우리는 나비를, 얼굴을, 의미를 발견합니다.

인지신경심리학자 크리스 나이바워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나'라는 자아 자체도 뇌가 만든 하나의 패턴이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생각, 기억, 감정, 경험을 뇌가 엮어서 '나'라는 주인공을 세우고, 이 자아는 끊임없이 생각을 만들어내며 자기 존재를 유지합니다.

R&D 기획자로서 저에게도 강력한 패턴들이 있었습니다.

"연구과제는 이렇게 구성되어야 한다."

"성공적인 프로젝트는 이런 특징을 갖는다."

"우리 분야의 혁신은 이 방향이다."

기계공학 박사 과정과 십수 년의 프로젝트 관리 경험이 만들어낸 견고한 패턴들이었습니다.


불안이 만드는 경직된 사고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자아가 위협을 느낄 때 뇌의 패턴 인식이 더 강해진다고 합니다. 불안할수록 뇌는 더 필사적으로 기존 패턴에 매달립니다.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이 수십억, 수백억입니다. 실패하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뇌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검증된 방법, 이전 성공 사례, 안전한 선택지를 찾습니다. 혁신적이지만 불확실한 제안보다 평범하지만 안전한 제안을 선호하게 됩니다.

평가위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연구가 실패하면 어쩌지?"

"내가 이걸 승인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이런 불안이 커질수록, 우리는 더 보수적인 판단을 내립니다. 뇌가 자아를 지키려고 기존 패턴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PMP와 Agile 방법론을 공부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조직에는 Agile이 안 맞아", "제조업 R&D에서는 전통적 방법론이 맞아"라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새로운 방식에 대한 불안이 만들어낸 저항이었습니다.


AI 시대, 인간이 가져야 할 것

생성형 AI를 R&D 기획에 접목하는 작업을 하면서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에서 패턴을 찾는 데 탁월합니다. 하지만 정작 혁신은 패턴을 깨는 데서 나옵니다.

ChatGPT에게 연구개발 계획서를 작성하게 하면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결과물이 나옵니다. 하지만 대부분 기존 방식의 조합입니다. AI는 학습한 패턴을 재구성할 뿐, 패턴 밖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진짜 혁신은 인간이 기존 패턴을 인식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때 일어납니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했지만, 왜 꼭 그래야 할까?"

"이 전제를 내려놓으면 어떻게 될까?"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이 AI 시대 인간의 역할입니다.


생각을 바라보는 연습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자신의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크리스 나이바워가 제안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프로젝트 기획 회의에서 시도해봤습니다. "이건 안 돼"라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지금 '이건 안 돼'라고 생각하고 있구나"라고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봤습니다. 그러자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생각이 절대적 진실이 아니라, 과거 경험에서 형성된 하나의 패턴일 뿐이라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기술은 우리 분야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판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발짝 물러서서 보니, 그것은 기계공학이라는 특정 렌즈로 본 해석이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얼마든지 적용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이를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자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아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만들어지는 패턴임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Agile의 핵심 가치인 '변화에 대응하기'도 결국 같은 맥락입니다. 기존의 계획이라는 패턴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죠.


현재에 머무는 힘

명상 수련자들은 호흡에 집중합니다.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계획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주의를 둡니다. 그러면 끊임없이 패턴을 만들어내던 뇌가 잠시 멈춥니다.

Agile 스프린트 리뷰도 비슷합니다. 한 달 뒤, 일 년 뒤를 걱정하는 대신, 지난 2주 동안 실제로 무엇이 만들어졌는지, 지금 무엇을 배웠는지에 집중합니다. 현재에 머물 때 비로소 명확하게 보입니다.

연구과제 중간평가에서도 적용해봤습니다. "원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네"라는 판단 대신,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떤 데이터가 나왔고, 무엇을 발견했는가?"에 집중했습니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긍정적 결과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패턴을 알고, 패턴에서 자유로워지기

R&D 전략 기획자로서 저는 패턴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기술 트렌드의 패턴, 성공적인 연구의 패턴, 효과적인 프로젝트 관리의 패턴을 찾고 적용하는 것이 나의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패턴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패턴은 과거 데이터의 산물입니다. 혁신은 아직 패턴이 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납니다.

크리스 나이바워는 말합니다. "자아는 단단한 실체가 아니라 뇌가 세상을 정리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에 가깝다."

R&D 전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뇌가 만들어낸 패턴일 뿐입니다. "이 분야는 원래 이래", "연구개발은 원래 이런 식으로 해야 해"라는 생각들 말입니다.


혁신은 텅 빈 공간에서

세 개의 팩맨 모양이 적절히 배치되면 우리는 그 가운데 삼각형이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텅 빈 공간일 뿐입니다.

혁신도 그렇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기존 요소들 사이의 텅 빈 공간, 아직 아무도 패턴을 발견하지 못한 그곳에서요. 그 공간을 보려면 먼저 우리가 만들어낸 삼각형을 지워야 합니다.

요즘 저는 연구제안서를 검토할 때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패턴으로 이것을 보고 있는가?"

"이 판단은 과거의 어떤 경험에서 온 것인가?"

"만약 이 전제를 내려놓으면 무엇이 보일까?"

답은 여전히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는 순간, 뭔가 달라집니다. 생각의 노예가 아니라 생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 텅 빈 공간에서, 진짜 혁신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아의 노예가 아니라 자아를 바라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 크리스 나이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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