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진짜 바나나를 맛본 순간
스티브 잡스의 '컨설팅 출신' 일화를 읽으며,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PMP와 Agile 자격증으로 무장한 채 국가 R&D 기획의 세계에 뛰어든 지 어언 몇 년. 그동안 나는 과연 바나나를 먹어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바나나 사진만 찍어왔던가.
처음 R&D 전략 기획을 시작했을 때, 나는 완벽한 보고서를 만드는 데 집착했다. 해외 사례를 분석하고, 트렌드를 예측하며, 로드맵을 그렸다. 특히 AI 기술을 R&D 기획에 접목시키는 방법론을 개발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혁신가라고 생각했다. 프레임워크는 정교했고, 전략은 논리적이었으며, 발표 자료는 언제나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어느 날, 한 연구책임자가 내게 물었다.
"김 박사님, 이 기획서대로 하면 정말 될까요? 실험실에서 직접 해보신 적 있으세요?"
그 질문에 나는 답하지 못했다. 나는 '기획'의 전문가였지, '실행'의 전문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직접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기획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원들과 함께 실험실에서 밤을 새웠다. 코드를 직접 짜보고, 데이터를 수집하며, 실패를 경험했다. 생성형 AI를 활용한 혁신 모델을 구축하면서도, 이론과 현실의 간극을 뼈저리게 느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사람'이었다. 내 완벽한 프로젝트 관리 방법론은 연구원들의 창의성을 오히려 억압했고, Agile 스프린트는 때로 연구의 본질을 해쳤다. 숫자와 지표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연구 현장의 열정과 좌절,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발견의 순간들이 있었다.
한 젊은 연구원이 내게 말했다. "박사님, 계획대로 안 되는 게 연구 아닌가요? 실패할 자유가 없으면 혁신도 없어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만들어온 정교한 기획서와 평가 체계는 '바나나 사진'이었다. 진짜 연구, 진짜 혁신은 현장의 흙먼지 속에서, 실패의 쓴맛 속에서,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발견의 달콤함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다르게 일한다. 여전히 전략을 기획하고 성과를 관리하지만, 현장을 떠나지 않는다. 연구원들과 함께 코드를 리뷰하고, 실험 결과를 직접 확인하며, 실패의 책임을 함께 진다. AI 도구를 활용해 효율성을 높이되, 그것이 사람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창의성을 증폭시키는 도구가 되도록 한다.
최근 한 대형 프로젝트가 실패했다. 과거의 나였다면 보고서에 '외부 환경 변화'나 '예측 불가능한 기술적 난제' 같은 표현으로 포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실패의 진짜 이유는 우리가 현장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지 않았고, 연구원들의 직관을 무시했으며, 숫자에만 매몰되어 있었다는 것을.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흉터야말로 진짜 무언가를 해냈다는 훈장이다. 이제 내 이력서에는 화려한 자격증과 학위만이 아니라, 실패한 프로젝트의 흔적도 있다. 그리고 그 실패에서 배운 교훈이, 어떤 이론서보다 더 값진 자산이 되었다.
오늘도 나는 실험실로 향한다. 완벽한 전략 보고서를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실패할 준비를 하고 간다. 바나나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니라, 바나나를 직접 까서 먹고, 때로는 썩은 바나나의 쓴맛도 감수하는 사람으로서.
진짜 혁신은 보고서에서 나오지 않는다. 손에 묻은 기름때와 밤새워 빨갛게 충혈된 눈, 그리고 수없이 지우고 다시 쓴 코드 속에서 나온다. 이제야 나는 진짜 R&D 전략플래너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참고: https://youtube.com/shorts/rUMLAU1QW68?si=7Ke7RRmbvs91Fgt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