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아우라를 가진 유일한 존재로 살아가는 법

대체 불가능한 '내 이름'으로 이 시대를 건너가는 법

어느 날 문득, 내가 작성한 기획서와 ChatGPT가 생성한 초안을 나란히 놓고 바라봤다. 구조도 비슷했고, 논리 전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 문장은 AI가 생성한 것이 더 매끄러웠다. 그 순간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편한 질문. "내가 하는 일은 정말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AI R&D 전략을 기획하고 평가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보니, 이 질문은 더욱 절박하게 다가온다. 생성형 인공지능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가장 절실하게 고민해야 하는 역설 속에 서 있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아우라'라는 개념을 이야기했다. 원본만이 가진,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존재했다는 일회성의 가치. 사진과 인쇄술로 예술작품이 무한 복제되면서 그 아우라가 사라진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AI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코드를 생성하는 시대에 인간의 아우라는 무엇일까?


어떤 이야기를 내 이름에 연결할 것인가?


요즘 LinkedIn을 보면 화려한 프로필들이 넘쳐난다. 누구나 '혁신가'이고 '전략가'이며 '전문가'다. 하지만 그 이름들 아래 진짜 이야기가 있는 경우는 드물다. 성공한 프로젝트 목록, 화려한 수상 경력, 기술 스택의 나열. 이것들은 모두 '사실'이지만 '이야기'는 아니다.


진짜 이야기는 실패한 기획안에서 배운 교훈에 있고,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중재하며 밤을 새웠던 그 치열함에 있으며, 데이터가 한 방향을 가리킬 때 다른 길을 선택해야 했던 그 고민에 있다. 국가 R&D 생태계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10년을 걸어온 그 여정, 전통적인 프로젝트 관리 방법론과 생성형 AI를 결합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했던 시행착오들. 이런 서사는 ChatGPT가 생성할 수 없다.


단편적 에피소드와 서사의 차이는 명확하다. 에피소드는 점이고, 서사는 선이다. 에피소드는 "이런 일이 있었다"로 끝나지만, 서사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변했고, 이것을 배웠으며, 다음은 이렇게 하고자 한다"로 이어진다. 내 이름에 점들만 찍혀 있다면, 그것은 이력서일 뿐이다. 하지만 그 점들이 하나의 궤적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나만의 이야기가 된다.


나는 누구나 반복 가능한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가장 무서운 건 바쁘다는 착각이다. 매일 회의에 참석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메일에 답하다 보면 하루가 간다. 생산적인 것 같지만, 돌이켜보면 그중 얼마나 많은 일들이 프롬프트로 대체 가능한 것들인가?

프로젝트 관리에서 PMP와 Agile의 진정한 가치는 프레임워크 그 자체가 아니다. 수많은 프로젝트를 거치며 체득한 것은, 모든 프로젝트에는 고유한 맥락이 있고, 그 맥락을 읽어내는 능력이야말로 전문가의 핵심이라는 사실이다. 같은 방법론을 적용해도, 팀의 성숙도, 조직 문화, 이해관계자의 역학관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AI는 템플릿을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회의실의 미묘한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프로젝트 보고서에 명시되지 않은 진짜 리스크가 무엇인지, 숫자 뒤에 숨은 팀원들의 소진을 어떻게 읽어낼지는 가르쳐주지 못한다. 이것은 반복 불가능한, 축적된 경험과 직관의 영역이다.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지금 내가 하는 이 일, AI에게 프롬프트로 지시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점점 '승인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진짜 전문성은 AI가 제공한 초안을 보고 "우리 상황에서는 이 부분을 다르게 가져가야 한다"고 판단하는 능력에 있다.


불안과 망설임을 견디는 시간


AI의 가장 큰 한계는, 불안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AI는 확률로 답하지만, 인간은 불확실성 속에서 결단한다.


R&D 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은 언제나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데이터는 불충분하고, 이해관계는 복잡하며,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이럴 때 AI는 여러 시나리오와 확률을 제시할 수 있지만, 최종 결정은 결국 인간이 내려야 한다. 그리고 그 결정에는 책임이 따른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망설임조차 중요하다. AI는 즉각 답하지만, 인간의 망설임에는 윤리적 고민, 다층적 사고, 결과에 대한 책임감이 담겨 있다. 효율의 시대에 우리는 망설임을 제거해야 할 비효율로 여기지만, 진짜 사유는 그 망설임의 시간에 일어난다.


작년, 한 국가과제를 평가하면서 데이터는 명확히 부정적 신호를 보냈지만, 연구책임자의 눈빛에서 뭔가 다른 가능성을 읽었던 적이 있다. 며칠을 고민했다. AI라면 데이터대로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불안을 견디며 추가 면담을 요청했고, 결국 데이터가 포착하지 못한 중요한 맥락을 발견했다. 그 프로젝트는 지금 의미 있는 성과를 내고 있다.


불안과 망설임, 실패 가능성을 견디는 시간. 이것은 비효율이 아니라,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다.


AI에 지능을 위탁하는가, 스스로 사유하는 주체인가?


요즘 가장 조심스러운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생성형 AI를 적극 활용하면서도, 그것에 판단까지 위탁하지 않는 경계선을 유지하는 것.


도구로서의 AI와 주인으로서의 AI는 다르다. 내가 AI에게 "R&D 기획서 초안 작성해줘"라고 요청하고 그 결과를 출발점으로 비판적으로 재구성한다면, AI는 훌륭한 도구다. 하지만 AI가 제안한 방향을 그대로 수용하고, 내 판단을 AI의 결과로 대체한다면, 나는 주체성을 잃은 것이다.


최근 한 워크숍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같은 과제에 대해 한 그룹은 AI 없이 기획하고, 다른 그룹은 AI를 활용해 기획했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AI를 활용한 그룹의 기획안이 형식적으로는 더 완성도가 높았지만, AI 없이 작업한 그룹에서 더 창의적이고 맥락에 맞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AI는 평균을 잘 만들어낸다. 하지만 혁신은 평균에서 나오지 않는다. 혁신은 "이건 우리 상황에선 다르게 접근해야 해"라는 맥락적 판단, "데이터는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저렇게 생각해"라는 직관, "실패할 수도 있지만 이 길로 가보자"는 용기에서 나온다.


며칠 전, 한 후배 연구자가 물었다. "AI 시대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나는 이렇게 답했다. "살아남는 게 목표가 아니라, 대체 불가능해지는 게 목표예요."


대체 불가능함은 AI가 못하는 것을 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AI를 활용하되, AI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지키는 데서 온다. 복제 불가능한 경험의 축적. 불확실성을 견디는 용기. 맥락을 읽는 직관. 책임을 감수하는 결단. 그리고 무엇보다, 효율성보다 의미를 선택하는 용기.


AI 시대의 아우라는 완전히 최적화되기를 거부하는 능력이다. 모든 것을 자동화할 수 있을 때, 어떤 것은 자동화하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것. 모든 답을 즉각 얻을 수 있을 때, 어떤 질문 앞에서는 망설이고 고민하는 것. 모든 결정을 데이터로 내릴 수 있을 때, 어떤 결정은 직관과 책임으로 내리는 것.


내 이름, 당신의 이름에 연결된 이야기는 무엇인가? 단편적 에피소드의 나열인가, 아니면 하나의 의미 있는 서사인가? 우리는 반복 가능한 일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오직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AI 시대를 건너가는 법은 결국, 인간으로 남는 법이다. 효율적인 기계가 아니라, 불완전하지만 사유하는 주체로. 최적화된 알고리즘이 아니라, 망설이고 고민하며 그 과정에서 더 깊어지는 인간으로.


그렇게, 우리는 대체 불가능한 '내 이름'으로 이 시대를 건너간다.


참고: https://www.youtube.com/shorts/5rdro6xvw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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