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발 '과학자 엑소더스'를 기회로 만든 J-RISE 전략
2025년 여름, 글로벌 과학기술계에 예상치 못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연구개발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각종 제도적 제약을 확대하면서, 미국 내 우수한 과학자들이 대거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소위 '미국 과학자 엑소더스(Exodus)'라 불리는 이 현상은 전 세계 각국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왔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이시바 총리가 6월 4일 국제 우수 인재 유치 대책 마련을 지시한 지 불과 9일 만인 6월 13일, 일본 정부는 'J-RISE(Japan Research & Innovation for Scientific Excellence) 이니셔티브'를 공식 발표했다.
9일. 정책 결정에서 발표까지 걸린 시간이다.
이는 단순한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이 보여준 것은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전략적 사고와 실행력이었다.
J-RISE를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점은 그 체계성이었다. 대부분의 인재 유치 정책이 단순히 "좋은 조건을 제시해서 과학자를 모셔오자"는 수준에 머무르는 반면, 일본은 아예 연구 생태계 자체를 재설계하는 접근을 택했다.
먼저 제도적 기반부터 다졌다. 국제우수연구대학(UIRE) 지정 제도를 통해 대학의 거버넌스 구조를 국제 기준에 맞게 개편하도록 했다. 외부 참여 이사회 중심의 유연한 의사결정 체계, 자체 대학기금 활용 전략까지 요구하는 수준이다. 2024년 도호쿠대학이 일본 최초로 이 지정을 받았고, 이제 이런 대학들이 인재 유치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다음엔 실행 수단을 정교하게 설계했다. EXPERT-J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만 45세 미만의 젊은 연구자들을 타겟으로 삼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단순히 연구자를 '고용'하는 게 아니라 PI(연구책임자) 역할을 맡겨 독립적인 연구를 이끌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정년 보장이나 테뉴어 트랙까지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10조 엔 규모의 대학기금을 투입했다. 이는 일회성 예산이 아니라 기금 운용 수익을 활용한 지속가능한 투자다.
J-RISE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연구자의 생애주기를 완전히 고려한 설계였다.
첫 번째 단계는 '유치'다. 미국 주요 대학 대비 3~5배 낮다고 인정받던 일본의 연봉 수준을 대폭 끌어올려 경쟁력 있는 처우를 제공한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두 번째는 '정착'이다. 단순히 좋은 급여만 주는 게 아니라, 연구자가 진짜 원하는 것인 독립적인 연구 환경을 제공한다. PI로서 자신만의 연구팀을 꾸리고 프로젝트를 주도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자립'이다. 정년 보장이나 테뉴어 트랙을 통해 장기적인 커리어 안정성을 확보해준다. 연구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인데, 이 부분을 확실히 해결해주는 것이다.
마지막은 '기여'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지원받은 연구자들이 일본 연구 생태계 전반의 경쟁력 강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연구자 한 명을 유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전체 커리어를 일본에서 펼칠 수 있도록 생태계를 만든다는 발상이다.
같은 기회 앞에서 한국의 대응은 어떨까. 솔직히 말하면 아직 체계적인 전략을 보기 어렵다.
물론 한국도 나름의 강점이 있다. 세계적 수준의 IT 인프라, 역동적인 스타트업 생태계, 그리고 무엇보다 빠른 실행력. 하지만 이런 강점들이 인재 유치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못한 상황이다.
일본이 9일 만에 정책을 발표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우리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일본을 따라 하는 것보다는 우리만의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한국의 강력한 스타트업 생태계와 연계해서 '연구-창업-상용화'의 통합적 경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아시아 시장으로의 접근성이라는 지정학적 장점을 활용할 수도 있다.
J-RISE 사례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일까. 바로 외부 환경의 변화를 재빨리 기회로 전환하는 전략적 사고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화는 분명 미국 과학계에게는 위기였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즉시 자국의 기회로 인식했다. '국제두뇌순환(International Brain Circulation)'이라는 명확한 비전 하에, 제도-인력-재정을 아우르는 통합적 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국 이런 민첩성과 전략적 사고에 달려 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회로 만들어내는 능력.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실행력.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국은 미국의 우수한 과학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한국도 이 경쟁에서 뒤처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단순히 경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차별화된 전략으로 승부해야 한다.
미래는 결국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모이는 곳에서 만들어진다. 그 미래를 한국에서 만들어갈 수 있을까. 그 답은 우리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참고 자료
한국연구재단, 「美 과학자 엑소더스와 일본의 영입 전쟁」, NRF R&D BRIEF 2025-40호
JST, J-RISE Initiative 공식 발표자료
Cabinet Office Japan, EXPERT-J 프로그램 안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