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AI 연구, 과연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며칠 전 대전의 한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후배 연구원과의 대화였다.
"선배, 저희 연구소에서 AI 모델 하나 개발했는데, 혹시 비슷한 거 ETRI에서도 만들고 있지 않을까요?"
"음... 아마 만들고 있을 걸? KIST에서도 비슷한 프로젝트 본 것 같은데."
"에이, 설마요. 그럼 우리가 헛짓거리 하고 있는 건가요?"
그 순간 뭔가 이상했다. 왜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연구소들이 서로 뭘 하는지 모르고 있을까?
우리나라에는 20개의 정부출연연구소가 있다. 모두 AI 연구를 하고 있다. 모두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KIST는 AI·로봇연구소를 중심으로 차세대 알고리즘을 연구한다.
ETRI는 인공지능연구소에서 AI & 휴먼증강 분야를 개발한다.
KAIST는 양자통신과 웨어러블 기술을 융합한다.
KISTI는 국가연구데이터플랫폼으로 AI 연구를 지원한다.
모두 훌륭한 일이다. 그런데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마치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이웃들이 각자 정원에 텃밭을 가꾸는 것과 같다. 각자의 텃밭도 좋지만, 함께 큰 농장을 만든다면 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지 않을까?
2022년 ChatGPT가 세상에 나왔을 때, 모든 연구소가 술렁였다.
"우리도 빨리 뭔가 해야 해!"
"예산 신청서에 AI 넣어야겠어."
"경쟁 연구소보다 먼저 성과 내야 해."
그렇게 각자 AI 인프라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각자 데이터를 모으고, 각자 모델을 만들고, 각자 논문을 쓴다.
하지만 잠깐, 이게 맞나?
어느 날 정부 관계자가 말했다.
"연간 AI 연구비가 수천억 원인데, 왜 성과는 이 정도밖에 안 나와요?"
답답했다. 연구자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다. 똑똑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문제는 시스템이었다.
20개 연구소가 비슷한 AI 인프라를 각각 구축하고 있었다. 마치 한 집안의 형제들이 각자 집에 똑같은 세탁기를 사는 것과 같았다.
연구데이터는 기관별로 따로 보관된다. A연구소의 데이터를 B연구소에서 쓰려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때로는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게 더 빠르다.
"선배, 그냥 우리끼리 하는 게 나은 것 같은데요."
후배의 말이 가슴을 찔렀다.
한편 세계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미국은 AI 시스템의 편향성 표준을 만들고,
독일은 AI 위험관리 표준을 주도하고,
중국은 AI 데이터 표준화에 적극 나서고,
일본은 AI 서비스 생태계 표준을 추진한다.
우리나라도 ISO/IEC JTC 1/SC 42라는 국제표준화기구에서 'AI Service Ecosystem'을 제안했다. 나름 의미 있는 시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다. 국제 표준은 만들면서, 정작 국내 연구소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AI를 개발하고 있다니.
그러던 중 FAIR 원칙을 알게 됐다.
Findable (발견가능): 데이터를 쉽게 찾을 수 있어야 한다.
Accessible (접근가능): 표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Interoperable (상호운용가능): 다른 시스템과 연동될 수 있어야 한다.
Reusable (재사용가능): 다른 연구에서 재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간단하지만 강력한 원칙이었다.
만약 KIST에서 개발한 AI 모델을 ETRI에서 바로 사용할 수 있다면?
만약 모든 연구소의 데이터가 표준화된 형태로 공유된다면?
만약 연구자들이 중복 작업 대신 협업에 집중할 수 있다면?
상상만 해도 흥미진진했다.
며칠간 계산해봤다.
현재 각 연구소가 AI 인프라에 쓰는 예산을 조사하고, 중복되는 부분을 찾아내고, 표준화 시 절약 가능한 비용을 산출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연간 100억 원 이상 중복투자 방지 가능
연구 기간 30% 단축 (데이터·모델 공유 효과)
융합연구 2배 증가 (기관 간 협업 활성화)
표준화에 드는 비용은 5년간 300억 원 정도. 3년 만에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
투자 관점에서 봐도 매력적이었다.
집에 돌아와 노트에 적었다.
"20개 연구소가 힘을 합치면:
연간 100억 절약
연구 효율 30% 향상
국가 AI 경쟁력 5위권 진입
문제는 어떻게 시작하느냐다."
머릿속으로 로드맵을 그려봤다.
1단계 (2025-2026): 기반 만들기
각 연구소 AI 현황 정밀 조사
공통 메타데이터 스키마 개발
2-3개 기관 파일럿 프로젝트
2단계 (2027-2028): 표준 확산
FAIR 원칙 기반 데이터 표준 적용
API 인터페이스 표준화
보안 및 거버넌스 체계 구축
3단계 (2029-2030): 통합 완성
전체 연구소 통합 AI 플랫폼
국제표준과 호환성 확보
지속 개선 체계 운영
현실적이면서도 야심찬 계획이었다.
시간이 촉박하다.
전 세계 AI 표준화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주도권을 놓칠 수 있다.
다행히 정부에서도 초거대 AI 기반 서비스 개발을 지원하고 있어 타이밍은 좋다.
가장 시급한 일:
1개월 내: 범부처 표준화 TF 구성
6개월 내: 현황조사 및 파일럿 기획
1년 내: 예산 확보 및 본격 추진
다시 그 카페에 갔다. 후배에게 말했다.
"너희 연구소 AI 모델, 헛짓거리가 아니야. 다만 혼자 하면 한계가 있어. 함께 하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고."
"그런데 어떻게요?"
"표준화야. 20개 연구소가 같은 언어로 대화할 수 있게 만드는 거지."
후배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우리가 만든 AI 모델을 다른 연구소에서도 쓸 수 있게 되는 건가요?"
"그렇지. 그리고 다른 연구소의 좋은 모델도 우리가 쓸 수 있고."
아프리카 속담이 떠올랐다.
"혼자 가면 빠르게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
지금 우리 연구소들은 각자 빠르게 가고 있다. 하지만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
20개 연구소가 힘을 합치면, 연간 100억을 절약하고 연구 효율성을 30% 높일 수 있다. 그리고 국가 AI 경쟁력을 세계 5위권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각자 우물을 파는 이웃들에게 "함께 저수지를 만들자"고 제안하는 일.
쉽지 않지만, 누군가는 시작해야 한다.
그 시작이 지금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