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끝
지난 7월의 어느 더운 날, 정부에서 한 가지 발표가 있었다. 1996년부터 30년간 우리나라 연구개발을 지배해온 PBS(Project-Based System, 연구과제중심 운영제도)를 전면 폐지한다는 소식이었다. 과학기술계에는 마치 오랜 감옥에서 풀려난 듯한 해방감이 흘렀다. 하지만 정말 이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까?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김민수 박사가 최근 발표한 기고문을 읽으며, 나는 이 문제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깊다는 것을 깨달았다. PBS는 단순한 제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생태계였고, 문화였으며, 우리 연구자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상상해보자. 매년 연초가 되면 연구소 복도는 분주해진다. 연구자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과제 제안서를 쓰느라 밤을 지새운다. 왜? 살아남기 위해서다. PBS 체제에서 연구자의 인건비와 연구소 운영비는 과제를 따와야만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몇 개나 땄어?"
연구소 내에서 이런 대화가 일상이 되었다. 과제 수주액이 곧 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지표가 되어버린 현실. 정작 중요한 것은 연구의 질이나 사회적 기여도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돈을 따왔느냐였다.
어느 선배 연구자는 이렇게 토로했다. "30년 전엔 연구가 재미있었는데, 이젠 1년 내내 과제 쓰느라 정작 연구할 시간이 없어." 역설적이게도, 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제도가 연구를 방해하는 주범이 되어버린 셈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연구자들 간의 관계였다. 예전에는 대학의 기초연구에서 시작해 출연연의 응용연구, 기업의 상용화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협력의 사다리가 있었다. 하지만 PBS는 이 모든 것을 경쟁으로 바꿔버렸다.
작년에 함께 연구했던 동료가 올해는 경쟁자가 되는 웃지 못할 상황들. 국내 기술력을 함께 키워나가야 할 파트너들이 서로의 밥그릇을 두고 싸우는 모습. 김민수 박사는 이를 두고 "국내 연구개발 가치사슬의 해체"라고 표현했다.
출연연은 특히 불리했다. 대학은 기본 운영비가 있고, 기업은 자체 자금이 있었지만, 출연연은 과제로만 살아야 했다. 마치 무기도 없이 전쟁터에 내몰린 격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PBS의 가장 큰 폐해는 우리나라에서 '전략'이라는 것을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개별 과제의 당위성만 중요했지, 그 과제들이 모여서 어떤 큰 그림을 그리는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매년 새로운 기술 로드맵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전략이 아니라 예산을 따오기 위한 서류에 불과했다. 해외 자료들을 짜깁기해서 그럴듯하게 포장한 문서들이 만들어지고, 1년 뒤엔 또 다른 문서로 대체되기를 반복했다.
"탈추격 시대에 필요한 국가 기술전략 역량의 20년간 공백." 김민수 박사의 이 한 문장이 가슴에 와 닿았다. 우리가 선진국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어야 하는데, 정작 그 방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PBS를 없애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까? 김민수 박사는 단호하게 말한다. "PBS의 전면적 폐지는 결코 올바른 해법이 될 수 없다."
제도에는 선악이 없다. 다만 적절한 곳에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할 뿐이다. 마치 칼이 요리할 때는 유용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위험한 것처럼, PBS도 올바른 목적과 방식으로 사용된다면 여전히 유효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정부의 긴급한 정책 과제나 특별한 사회문제 해결이 필요할 때는 프로젝트 방식이 적합하다. 코로나19 대응이나 탄소중립 전환 같은 상황에서 말이다. 하지만 출연연의 기본적인 연구활동까지 모두 이런 방식으로 할 필요는 없다.
정부는 PBS 대신 '임무중심 R&D'를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단순히 '큰 과제'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완전한 오해다.
진짜 임무중심 연구는 기술적 성과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고, 우리가 직면한 도전과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개별 연구의 우수성이 아니라, 여러 연구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사회적 혁신을 지향하는 것이다.
영국과 유럽에서 말하는 '미션 오리엔티드 이노베이션 폴리시(mission-oriented innovation policy)'가 바로 이것이다. 단순히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실제로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김민수 박사는 진정한 임무중심 R&D로 가기 위해 세 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첫째, 임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주체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임무'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사용해왔다. 진짜 임무란 무엇인지, 누가 그것을 정의하고 실행할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둘째, 국가적 전략 체계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출연연은 각 분야의 기술전략을 만들고, 연구회는 그것들을 통합하며, 정부는 정책적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서로 협력하는 수평적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셋째, 출연연의 진짜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정부 눈치만 보느라 정작 연구자들의 목소리는 묻혔다. 독일처럼 연구자 평의회 같은 제도를 도입해서 연구자들이 직접 연구의 방향을 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변화가 AI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연구개발 방식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연차별 고정 계획 대신 애자일 방식의 유연한 기획, 생성형 AI를 활용한 효율적인 기술동향 분석, 데이터 기반의 실시간 성과관리 등이 가능해질 것이다.
특히 과제 중심에서 임무 중심으로 바뀌면서, 연구성과를 평가하는 방식도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단순히 논문 몇 편, 특허 몇 건이 아니라, 그 연구가 사회에 미친 실질적 영향을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들이 필요할 것이다.
김민수 박사는 글의 마지막에서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기존 낡은 시스템의 붕괴가 곧 새로운 시스템의 시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PBS 폐지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30년간 몸에 밴 관습과 문화를 바꾸는 것은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연구자들은 과제 따오기 경쟁에서 벗어나 진짜 연구에 집중할 용기를 가져야 하고, 정부는 연구현장을 믿고 기다려주는 인내심을 가져야 하며, 국민들은 단기 성과에 급급하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연구개발을 바라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얼마 전 한 젊은 연구자를 만났다. 그는 박사과정을 마치고 출연연에 입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달라질까요?"라는 그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적어도 이제는 연구 제안서 쓰는 기술보다 실제 연구하는 실력이 더 중요해질 거야."
그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그는 PBS를 모르는 세대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순수하게 연구 자체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30년의 긴 터널을 지나 이제 새로운 길이 열렸다.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우리 모두에게 달려 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제는 과제 따오기가 아닌 진짜 호기심을 위한 연구, 논문 실적이 아닌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민수, "[기고] PBS 제도 생태계와 개선 방향", 대덕넷, 2025년 8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