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들의 꿈
"제대로 된 과학기술연구소를 갖게 되었으니 이를 관리할 정부기관이 필요하다"
1966년, 한 대통령의 이 말로 시작된 이야기가 있다. 거북선 모양으로 설계된 KIST 본관 건물처럼, 일본을 극복하겠다는 각오로 만들어진 우리 출연연의 이야기 말이다.
그때가 황금기였다. 학문별·산업별로 출연연을 세우고, 대덕연구단지를 건설하며, 연구비를 획기적으로 늘려갔다. 과학기술이 국가 발전의 엔진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연구자들은 그 믿음에 보답했다.
하지만 30년 전, 모든 것이 바뀌었다.
1996년 PBS(Project-Based System)가 도입되면서 출연연은 '프로젝트를 따오는 기관'이 되었다. 마치 용병처럼 이 프로젝트, 저 프로젝트를 전전하며 살아남아야 했다. 연구자들은 본연의 연구보다 과제 수주에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되었다.
"돈 먹는 하마"
기재부가 출연연에 붙인 별명이다. 하지만 정작 출연연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연구는 하지 못하고, 남이 시키는 일만 하고 있었다. 마치 재능 있는 요리사가 자신만의 요리는 만들지 못하고, 주문받은 음식만 계속 만들어야 하는 상황과 같았다.
김박사(가명)는 출연연에서 20년을 보낸 베테랑 연구자다. 그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침 9시, 출근하자마자 확인하는 것은 연구 논문이 아니라 공모 공고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 3개의 보고서 마감일을 체크하고, 새로운 과제 제안서 작성 일정을 점검한다.
"언제부터인가 연구자가 아니라 영업사원이 된 것 같아요."
김박사의 말이다. 한때 그가 꿈꾸던 연구는 '20년 후 인류에게 도움이 될 기술'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하는 연구들은 대부분 '2년 후 성과를 낼 수 있는 기술'들이다.
반면 미국의 한 국립연구소 연구자는 어떻게 살까?
그들에게는 '미션'이 있다. 기관 설립 목적에 맞는 큰 그림의 연구를 한다. 10년, 20년을 내다보며 인류가 풀어야 할 문제에 도전한다. 물론 정부가 급하게 요청하는 일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LDRD(Laboratory Directed R&D)'라는 제도다. 연구소장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연구비가 전체 예산의 3-6%나 된다. 이 돈으로 연구자들은 '실패해도 괜찮은' 도전적 연구를 한다.
실패해도 괜찮다니. 우리에게는 너무 낯선 말이다.
국정기획위원회가 PBS 폐지를 공표했다. 30년 만에 출연연이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연구자들의 반응은 복잡하다. 기쁨반 걱정반이다. 30년간 익숙해진 시스템을 바꾼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새로운 정책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떨까?
"마치 30년간 감옥에 있다가 갑자기 풀려나는 기분이에요. 자유가 주어진다는 건 기쁘지만, 그 자유를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기도 해요."
한 연구원의 솔직한 고백이다.
노환진 전 UST 교수는 최근 기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PBS 폐지로 인한 연구 생산성 증대는 10년 후에나 가능하다. 먼저 망가진 국가혁신체계를 다시 세워야 한다."
그의 말처럼 단순히 제도만 바꾼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30년간 쌓인 관성을 바꾸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의 회복이다.
정부는 출연연을 믿고 맡겨야 하고, 출연연은 그 믿음에 보답할 성과를 내야 한다. 국민들은 '세금으로 먹고사는 연구자들'이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가는 과학자들'로 출연연을 봐야 한다.
김박사에게 물었다. "만약 자유가 주어진다면 어떤 연구를 하고 싶으신가요?"
그의 눈이 반짝였다.
"기후변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싶어요. 당장 상업화는 어렵지만, 10년 후, 20년 후 인류를 구할 수 있는 그런 기술 말이에요."
이것이 연구자의 본모습이다. 당장의 성과에 쫓기지 않고,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이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PBS 폐지가 논의되는 지금, 세상은 AI 혁명의 한복판에 있다. 생성형 AI가 모든 것을 바꾸고 있는 시대에 출연연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미래의 출연연은 단순한 연구기관이 아니라 '정부의 두뇌' 역할을 해야 한다. 복잡해지는 사회 문제들에 대해 과학적 해답을 제시하고, 정책 결정을 뒷받침하는 싱크탱크가 되어야 한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듯, 출연연은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과학기술로 해답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2055년, 어느 신문 기사를 상상해본다.
"한국 출연연 개발 기술로 인류 최대 난제 해결... 30년 전 PBS 폐지가 터닝포인트"
물론 이런 일이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새로운 문화를 정착시키고, 무엇보다 연구자들이 다시 꿈을 꿀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 그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30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 출연연은 다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다.
1966년 거북선 모양의 KIST 건물에 담겼던 의지를 기억한다. 일본을 극복하겠다는, 과학기술로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그 마음.
2025년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꿈이 필요하다.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따라올 수 없는 독창적인 연구로 인류의 미래를 열어가겠다는 꿈.
PBS 폐지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30년간 잠들어 있던 거인이 깨어나는 순간이다.
출처
노환진, "[기고] PBS 폐지와 출연연 정책", 대덕넷, 2025.08.19
개인 인터뷰 및 현장 경험 (연구원 신원은 보호)
참고자료
KIST 50년사
미국 DOE National Laboratory 운영 현황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연구보고서
이 글은 기계공학 박사이자 AI R&D 전략플래너로 활동하며 국가연구개발사업 기획과 평가 업무를 담당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개인적 견해가 포함되어 있으며, 모든 인터뷰 대상자의 신원은 보호됩니다.